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Feb 16. 2022

독일 할머니 환자의 특별한 선물


한 손에는 전화기가 다른 한 손에는 여러 환자의 병가 그리고 처방전, 소견서 등이 들려 있다.

서류를 부채처럼 펼쳐 들고는 정신없이 병원 복도를 오가는 월요일 오전 진료 시간이었다.

주말 지나 월요일 이면 갑자기 아프게 되어 일하러 못 나간 직장인들과 학교 못 간 학생들이 병가를 받기 위해 병원 앞에 줄을 선다. 덕분에? 응급이 아니면 예약 진료를 하지 않는 월요일은 늘 분주하다.

물론 게 중에는 일하기 싫어서 또는 학교 가기 싫어서 꾀병이 난 나이롱환자들도 더러 있다. 월요일의 나이롱환자들  

그러나 요즘은 병원 진료실이 아닌 병원 주차장에서 야외 진료를 기다려야 하는 감기 또는 코로나 환자들인 경우가 더 많다.

 

채혈실 앞에서 2번 진료실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옮겨 가고 있을 때였다.

병원 입구로 막 들어 선 한 할머니 환자가 일명 할머니 유모차를 밀며 나를 다급히 부르셨다.

그때 나는 전화 통화하고 있던 환자에게는 진료 예약을 해주어야 했고 손에 든 서류 들에는 우리 병원 원장쌤의 싸인을 받아야 했으며 그 일들이 끝난 후에는 2번 진료실에서 환자 심전도 검사를 해야 했다.

해야 할 일들이 차례로 고개를 내밀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체 그 할머니 환자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리시라는 말을 남긴 체 급한 일 순으로 독일의  KTX 급인  ICE 속도로 일을 끝낸 후 다시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 환자에게 돌아갔다.

보행기를 밀고 다니시는 노인 환자분들 중에는 보통 행동도 말씀도 다른 노인 환자들에 비해 한 박자 쉬고 더 천천히인 경우가 많다.

그분들의 템포에 맞춰 여유 있는 대화를 나누려면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해 두고 시작해야 바쁜 날 다른 일 들이 더 뒤로 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께 여쭤 보았다.

“할머니 오늘 채혈 있으시죠?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노인 환자들 중에는 채혈이나 진료 가 있을 때 예약 시간보다 일찍 오셔서 미리 필요한 약의 처방전이나 피부과, 안과 등에 진료를 가기 위한 소견서들을 부탁 하시고 받아 가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얼굴보다 커 보이는 하얀 마스크 사이로 할머니의 눈이 곱게 접힌다.

곧이어 할머니는 "아니요, 이거 받아요 오늘이 밸런타인데이 라네"

하며 보행기 앞에 얹어서 밀고 오신 종이봉투를 무 밭에서 무 뽑듯이 뽑아 내게 안겨 주셨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든 봉투 사이로 비집고 나온 빨간 식물을 보며 "아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예요? 어머나 할머니, 밸런타인데이도 챙기세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우리 병원에 오신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처음 우리 병원을 찾아오셨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계신다. 처음엔 너무 통증이 심해 보행기를 밀고도 잘 걷지 못하셨는데 요즘은 이렇게 씩씩하게 보행기를 밀고 선물도 들고 다니시니 말이다.

사실, 독일에서 밸런타인데이는 이 동네 문화가 아니어서 젊은 사람들이나 초콜릿 또는 꽃 정도 주고받지 특별하게 챙기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날이다.

할머니 덕분에 나도 새삼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구나 했다.


선물은 줄 때나 받을 때나 언제나 사람을 무장해제시키고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히나 정성이 만져질 듯 들어간 선물에는 말이다.

할머니가 주신 선물 봉투 안에는 하트 뿅뿅 박힌 빨간 꽃화분 만 들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한코 한코 손뜨개로 뜬 아기자기 쁜 털실 실내화도 들어 있었고 직원들과 나눠 먹을 초콜릿도 들어 있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몇 명의 진상? 스런 환자들 때문에 맘이 상해 있었는데 할머니의 선물 덕분에 어느새 마음이 노글노글해졌다.

어여쁜 실내화에 발을 넣어 보니 발가락은 들어가고 발꿈치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실내화를 작은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 두어야겠다. 그리고 다음번에 할머니를 만나면 말씀드려야지..실내화 포근하게 잘 신고 있노라고...

보는 것 만으로 마음이 따사로워져서 이미 그 온기가 발까지 해졌으니 신고 있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를 미친 듯이 웃게 한 목요일의 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