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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필명 Jul 30. 2021

정보화시대

What a digital world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퇴근 후 단칸방으로 돌아온 동수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목덜미에선 끈적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세수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찬물에 몸을 적셨다. 샤워를 하다 보니 문득 휴지가 떨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자니 10초도 안되어 온 몸이 축축해질 것이 분명했다. 문득 통신사 멤버십으로 <0번가 쇼핑몰 10%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할인도 받고, 더위도 피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침대에 누워 쇼핑몰 앱을 설치했다. 이름과 생년월일,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회원가입을 했다. 가입 시 제공하는 1,000원짜리 할인 쿠폰을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요한 휴지와 몇 가지 생필품을 담고 나니 어느새 2만원이 훌쩍 넘어버렸다. 3만원부터는 배송비가 무료였지만 딱히 담을 것이 없었기에 그냥 결제하기로 했다.


결제를 위해선 먼저 카드등록이 필요했다. 체크카드는 지갑 속에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일어나 카드 번호, 유효기간, CVC번호, 비밀번호 앞자리 2개를 입력했다.


다음은 본인인증이 필요했다. <휴대전화로 본인인증하기>와 <간편 본인인증하기> 중 간편 본인인증을 선택했다. 간편 본인인증을 위해서는 <간편 본인인증 앱>이 필요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앱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번엔 간편 본인인증 앱의 회원가입이 필요했다. 다시 한번 이름과 생년월일,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다 보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패스워드에 특수문자 하나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조건이 난관이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패스워드에는 특수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목덜미가 축축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간편하지 않은 간편 본인인증은 포기하기로 했다. <휴대전화로 본인인증>을 하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장바구니에서 결제하기를 누르고, 주소를 입력하고, 결제수단 등록을 누르고, 카드번호, 유효기간, CVC번호, 비밀번호 앞자리 2개를 입력해 본인인증 화면에 도착했다. 전보다는 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에 묘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휴대전화로 본인인증하기>를 눌러 이름과 통신사,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문자로 받은 인증번호 6자리를 입력하니 본인인증은 꽤나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통신사 할인을 받을 차례였다. 이번에는 통신사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그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어봤다.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

5회 연속 오류 시 이용이 제한됩니다

<누적 시도 횟수 5회 중 1회>


자주 쓰는 비밀번호 3가지를 더 입력해봤지만 헛수고였다. 마지막 1번의 기회를 남겨둔 그는 <비밀번호 찾기>를 시도했다.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니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비밀번호를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비밀번호 재설정>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주 쓰던 비밀번호에 특수문자 하나를 더해 새로운 비밀번호를 생성했다.


다시, 장바구니로 돌아가 결제하기를 누르고, 주소를 입력하고, 통신사 할인 버튼까지 누른 그는, 통신사 아이디와 새롭게 생성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반복된 로그인 시도 탓인지 <로봇이 아닙니다. 기차가 있는 이미지를 모두 선택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격자모양으로 정렬된 9장의 사진이 떴다. 지능검사 수준의 <기차 고르기> 문제를 풀어 로봇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소 우스꽝스러웠지만, 이 관문만 통과하면 기나긴 고통의 시간은 끝날터였다.


그는 확신에 찬 손길로 3장의 이미지를 골랐다. 기차인지 지하철인지 헷갈리는 이미지가 1장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답안지를 제출하는 수험생의 심정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고, 다행히도 로봇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스마트폰을 붙잡고 씨름하는 대신 마트에 가서 휴지를 사 왔으면 샤워를 3번 더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통신사 할인 -2,300원>이란 글자를 보고 있자니 허탈함이 밀려왔지만, 그는 땀을 흘리지 않았음에 만족하기로 했다.


미리 등록해둔 카드가 있으니 결제는 수월했다. 체크카드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결제하기> 버튼을 눌렀다. 빙글빙글 도는 로딩창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휴지를 사기 위해 쏟아부은 그동안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동수는 코 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고, 질끈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 끝이다... 끝이야...’


기나긴 한숨 끝에 눈을 떠보니, 스마트폰 화면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있었다.


00:00-01:00

ㅁㅁ 은행 점검 시간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정보화 시대> 21.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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