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iday
띠.
띠.
띠띠.
띠리리리-
창석은 가능한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도어락의 모터가 돌아가고, 걸쇠가 걸렸다. 그 모든 매커니즘이 머릿속에 그려질만큼 집 안은 고요했다. 아내와 아이가 자고 있을 작은 방을 지나 거실로 들어왔다. 가능한 조심히 소파에 몸을 누이려했지만, 소파의 가죽커버끼리 부대끼며 아찔한 소리를 뱉어냈다. 잠시간의 소음 뒤에 찾아온 정적.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생각이 있는거냐?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따르르.
-유미야, 일어나야지
남편의 목소리에 유미는 잠에서 깼다. 시간은 새벽 4시. 밑준비는 어제 미리 해뒀으니 나머지 작업은 3시간이면 충분했지만, 안전하게 한 시간의 여유를 두기로 한 것이다. 올해는 깨알만한 트집도 잡히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시합 전 쉐도우 복싱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그려보는 선수처럼, 그녀는 완성해야 할 요리들을 차근차근 시뮬레이션 해보고 있었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이불을 끌어 안은채로.
-자기야, 나 커피 한잔만 타줘
코를 찌르는 참기름 냄새가 문 틈을 뚫고 들어왔다. 몸에 남아있는 담배 쩐내와 위스키 냄새는 어젯밤의 지저분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세 가지 냄새는 한데 뒤섞여 멀미 비슷한 울렁거림을 자아냈다. 창석은 턱끝까지 차오르는 구토를 간신히 누르고 주방으로 향했다. ‘넌 생각이 있는거냐?’ 새벽의 대화가 불현듯 스쳐갔다.
창석이 병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아내는 어쩐지 눈길 한번을 주지 않았다.
-뭐 필요한 거 없어?
-…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말 걸지 마라…
거실에 들리지 않을만큼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만큼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애기야, 마트 좀 갔다와야 쓰겄다.
거실에서 고사리를 다듬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것일까. 아내는 아침 7시에 문 여는 가게가 없을거라며 단칼에 시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창석은 그런 아내의 생각을 거절하기로 했다. 멀미나는 집구석으로부터, 아내의 따가운 눈총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뭔데요? 내가 갔다 올게.
아내의 비아냥 섞인 만류에도 창석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뭔 줄 알고. 이 시간에. 어디가서 사오게.
-내가 알아서 해.
-아~ 실컷 쳐자고, 이제 담배 피우러 가시게?
막내 아들의 막내 딸로 살아온 유미에게 명절은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이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어른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차례상 위에 차려진 동그랑땡이나 유과를 손으로 집어먹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잘 먹네, 우리 막내’ 하며 박수를 쳐줬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맏며느리가 되어버린 지금, 더 이상 박수를 쳐줄 사람은 없었다. 동그랑땡이든 잡채든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밥도 안쳤고, 국은 끓이고 있고, 나물은 자기가 무치고 있고. 뭐 빠진 거 있나?
-다 됐네. 시간 맞춰서 담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유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한시간이나 남았네…
-거봐, 좀 더 자라니까
-이번엔 별 말 없으시겠지?
-응. 완벽해.
-아니, 음식 말고…
창석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어제의 일을 곱씹어봤다. 1차, 2차, 3차, 담배 쩐내와 위스키 냄새, 그리고 싸구려 여자 향수냄새.
그에게 명절은 그런 것이었다. 아이가 생긴 뒤로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본가에만 도착하면 모든 것이 수월했다. 아내는 음식준비로 바빴고, 아이는 부모님께 맡기면 그만이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날때면 리아 아빠가 아닌 20대의 유창석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회계사 아내를 둔 유창석도, 사업에 실패한 유창석도 아닌 인간 유창석 그 자체로.
고향에서만큼은 당당하고 싶었다. 서울 집은 당신 집일지 몰라도, 이 집은 내 집이라고. 적어도 이 집에서만큼은 당신이 틀리고 내가 맞다고, 여기선 내가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토록 유치한 헤게모니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창석에게 이번 심부름은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과제였다.
‘문 연 가게가 없다고? 그건 당신 생각이고’
유미의 고부관계가 처음부터 삐걱거린 것은 아니었다. 시부모는 막내 딸로 자라온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음식이 서툴러도, 살림을 못해도, 부부가 같이 하면 된다며,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냐며 오히려 그녀를 다독였다.
물론 바라는 것이 아주 없진 않았다. 해가 갈수록 아이 문제가 서서히 그녀를 옥죄여왔다. 처음에는 ‘완곡한 권유’였던 것이, 어느새 ‘의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작년 명절, 시어머니와 함께 전을 부칠 때의 일이었다. 유미가 서툰 솜씨로 울퉁불퉁하게 빚은 동그랑땡이 문제였다.
-동그랗게 예쁘게 빚어야 아들 낳지.
-네, 어머님
-근데… 낳을 생각은 있는거니?
-…
유미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스튜어디스인 그녀에게 임신은 곧 퇴직이었다. 그때부터 대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 낳을거면 살림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괴상망측한 논리에 따라, 올 명절부터는 모든 음식을 혼자 준비해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오늘의 요리가 완전무결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소파에 앉은 채, 다시 한번 차례상을 점검해보던 유미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절 아침의 스산함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새벽의 안개가 음습한 분위기를 더했다. 바지 밑단이 젖어왔다. 창석은 어머니가 손수 적어준 <살 것 목록>을 살펴봤다.
‘근데… 편의점에서 이런 걸 팔았던가?’
확신은 없었지만, 자신은 있었다. 어쨌든 이 동네 지리는 훤히 꿰고 있으니, 적어도 편의점 두 세 군데 쯤은 들러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운무에 솟은 봉우리처럼 어슴푸레 빛나는 편의점이 보였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위에 빼곡히 진열된 제수용 청주 박스를 보니 희미하게나마 승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남은 시간은 30분. 유미는 아파트 단지 안의 편의점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콘돔과 생활용품 코너, 컵라면 코너를 지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조미료 코너로 향했다. 소금, 간장, 후추, 참기름까지. 명절 음식에 필요한 온갖 것이 다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저기 혹시, 깨 같은 거 있나요?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길다란 제수용 청주 박스를 들고 있었다. 바지는 어느새 무릎 아래까지 축축히 젖어있었다. 창석은 다시 한 번 메모지를 펼쳤다. 남아있는 숙취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유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깟 깨가 뭐라고’ 명절 아침부터 난리를 피우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지금이라도 발견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깨가 빠진 명절음식은 어쩌면 울퉁불퉁한 동그랑땡보다 더 큰 문제인지도 몰랐다. 파, 마늘도 아닌 깨가 빠진다면 한 눈에 티가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길 건너편으로 아까보다 큰 편의점이 보였다. ‘제발 있어라, 제발’ 유미는 초조한 마음으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편의점에 들어선 창석은 콘돔과 생활용품 코너, 컵라면 코너를 지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조미료 코너에 도착했다. 메모지의 목록들과 대조해보며 필요한 물건을 모두 바구니에 담았다. ‘문 연 가게가 없다고? 그건 당신 생각이고’ 우쭐해진 창석은 계산대로 향했다.
몇 번을 살펴봐도 참깨는 없었다. <볶음참깨 1,800원>이란 가격표 위엔 텅 빈 공백만이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 유미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출발해도 시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집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였다.
삑-
삑-
삑-
계산대 앞엔 무릎까지 젖은 슬리퍼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창석은 참깨와 참기름을 계산대 위에 올렸다. 청주, 참깨, 참기름까지. 이대로라면 완벽한 승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삑-
삑-
삑- 그리고 정적.
-이거 어쩌죠…
바코드를 찍던 점원은 포스기를 한참 바라보더니, 난처한 듯 참깨통을 들어보였다.
-유통기한이 지났는데요
명절 아침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했지만, 햇볕에 그을린 새벽 안개는 그 농도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편의점 처마 위로 담배연기가 뭉실 피어올랐다.
<홀리데이> 202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