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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필명 Aug 23. 2021

아무도 없었다

No one

    -아니, 남산에 이런 찻집이 다 있었나? 세상 좋아졌구만…


찻잔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사람 키만한 통창으로 명동 시내의 모습이 한 눈에 펼쳐졌다. 자동차도 사람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나아가고 있었다. 오후 5시의 햇살이 허동철 씨의 무릎에 떨어졌다. 그는 감회가 새로운 듯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그거 아나? 우리 때만 해도 이 남산이란 곳이 참 무시무시 했다고. 지금이야 젊은 것들이 데이트 한다고 들락날락 거리지만 여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였다 이거지.

    

    -여기 오는 사람은 둘 중 하나였어. 죽이러 오거나, 죽으러 오거나. 나? 이 사람아, 내가 죽으러 왔으면 자네랑 여기서 이렇게 떠들고 있겠나?


상대방의 얼토당토 않은 질문이 귀여웠던 모양인지 그는 아이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그땐 말이야, 우리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거야. 그때 같았으면 지금 자네처럼 내 눈을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거나 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벌써 오줌을 지렸거나, 똥을 지렸거나. 둘 중 하나였을거라고. 하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젊은 사람이 간땡이가 그리 작아서 어디 쓰겠나?

    

    -아 참, 김실장은 연락 없나? 이번 주에 골프나 한 게임 치자 그랬던 것 같은데. 이 형님이 죽을 때가 됐나. 정신머리를 어따 팔고 다니는 지, 원…


허동철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시계를 확인했다. 급하게 할 일이 생각난 듯 남은 녹차를 털어넣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만. 뉴스 할 시간 됐으니 그만 가보자고.


병원 안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가는 환자와 간호사들로 분주했다. 허동철의 간호사는 비어있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채워 넣었다. 찻잔엔 다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아니, 남산에 이런 찻집이 다 있었나? 세상 좋아졌구만…


간호사는 익숙하게 휠체어를 밀었다. 주황색 저녁 노을이 병원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 휠체어가 복도에 들어섰을 때에도 그의 눈은 의미없는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그거 아나? 우리 때만 해도 이 남산이란 곳이 참 무시무시 했다고...



<아무도 없었다> 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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