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단순한 삶 09화

자작나무숲으로

단순한 여행

by 정안

한 달 안에 써야 하는 하루의 휴가가 주어졌다.

소중한 휴가, 온전히 나만을 위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말고 그냥 문득 나 혼자 어딘가를 가자.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대중교통을 여러 방법으로 검색해봐도 마땅치가 않았다. 일단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갈아타기를 반복해서 번거로웠다.


차를 가지고 혼자 가보기로 했다.


비 오는 평일 아침,

출발할 때 느낌은 좋았다. 그러나 출근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혔다. 게다가 네비는 빠른 길을 찾아주느라 여러 도시의 시내 한복판을 안내했고 시원한 산과 하늘을 기대하며 나섰는데 거의 두 시간을 도시에서 뺑뺑 돌아야만 했다.


기차를 타고 떠났던 여행이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었는가 새삼 깨달았다.

다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자작나무가 가득한 하얀 숲을 생각하며 참고 참았더니 어느 순간 도로가 뻥 뚫리고 빌딩 숲이 아닌 진짜 숲이 나타났다.


가평휴게소에 들려 도넛과 커피 한잔을 샀다.

비 오는 날의 서늘하고 상쾌한 공기가 자유의 냄새와 함께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한적한 도로를 달려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평일이고 비가 와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배낭을 바투 매고 입구로 가니 안내소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산의 아랫길이 아닌 윗길로 가라고 했다. 나는 아랫길을 구비구비 걸어 산꼭대기에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가려고 했는데...

물어봤더니 원래는 아랫길로 안내를 하는데 며칠째 비가 와서 아랫길이 질척거리니 윗길로 가라고 한다.


나는 그냥 아랫길로 가면 안 되냐고 했다.

그 안내자는 말 안 듣는 학생을 쳐다보는 눈길로 나를 보더니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했다.



아랫길로 걷기 시작했다.

길은 질척이지 않고 걷기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깊고 호젓한 산길, 너무도 호젓한 산길이라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안내자가 윗길로 사람들을 다 보내서 앞으로 사람이 나타날 확률도 거의 없었다.


아... 갑자기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동행이 있던 여행이 그리워지고 하다못해 둘이서라도 왔더라면 이런 기분은 안느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려움 반, 뭔가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 반. 두 가지 감정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길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걷고 걸었다.

비는 그치고 날은 흐리고 나 혼자 이 숲 속에 있다.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이상한 감정을 안고 발에 닿는 흙의 감촉과 나무들이 뿜어내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걸었다.


한비야는 어떻게 혼자서 오지를 여행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읽었을 때는 몰랐다. 직장 4년 차 정도였던 나는 잘 나가던 직장을 집어던지고 떠난 그녀가 그저 멋지다고만 생각했다. 혼자라는 두려움을 어찌 이겨냈을까에 대한 생각은 별로 안 했다.


내가 경험해본 만큼 내가 아는 만큼 이해하고 느끼는 거였다.



비에 젖은 나무줄기는 검고 물이 들기 시작하는 나뭇잎은 노란빛을 띤 연두색이다.

가을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숲 속에 내가 있다. 가을은 영원한 시간이고, 나의 존재는 순간이다.


영화 "보이후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학생이 된 제이슨이 친구와 나누는 대화가 생각난다.


"순간을 잡으려고 하잖아. 근데 난 그 반대인 것 같아. 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지"


"맞아. 시간은 영원하고 순간은 지금이야"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때로는 운명에 맡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어떠한 순간이 나를 붙잡을지 기대하면서"

제작기간이 12년인 영화 "보이후드"


1년에 3~4일 정도, 12년 동안 만나서 촬영했다고 한다. 등장인물들이 영화와 함께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특별한 영화. 2시간 45분이라는 순간 안에 영원한 시간이 들어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면서 걷고 또 걷고 걷는다.

비가 내려 나뭇잎 냄새 흙냄새를 충분히 맡을 수 있다. 혼자여서 이 모든 느낌들이 선명하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흐린 하늘과 숲이 내 앞을 막아서지만 길은 여전히 있다.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 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길을 내면 된다.

결국 무엇이 먼저든 길은 생긴다.



전나무숲이 눈앞에 한가득 펼쳐진다.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두 사람이 걸어온다. 그 순간 느꼈던 안도감이라니... 사람이 참으로 반가웠다.


얼마 전 변두리에 있는 인기 많다는 카페에 갔었다.

크기도 컸고 식사와 커피, 온갖 종류의 빵들이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곳인 것 같았다. 식사를 하고 계단형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그 넓은 매장을 가득 채우고 줄까지 서있고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들은 급하게 마스크를 올리고 커피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없어 두렵고 사람이 너무 많아 두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드디어 숲 입구라는 팻말이 보인다.

"숲 입구"라는 안내판이 주는 신선함. 글씨체와 글자색이 셀레임을 준다. 작은 배려가 고맙다.


여기부터는 가파른 돌길을 올라가야 한다.

자작나무 숲은 산 맨꼭대기에 있다. 산책하는 차림으로 왔다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올라가는 중간에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았다.



자작나무의 하얀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초록의 잎들과 어울려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온통 흰색의 자작나무 숲은 놀랍다.

체험 교육장이라는 곳에서 숲을 바라보며 배낭에 넣어 온 커피와 도넛을 먹었다. 사람이 없어서 가능한 일.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도넛, 온 세상을 덮은 자작나무 숲과 살랑이는 바람, 더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을이 시작되는 나뭇잎들과 어우러진 흰 자작나무의 줄기들.

바라보는 내 머릿속도 하얘져서 아무 생각이 없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오니 이런 팻말이 있다.

나라에서 보호하고 지켜주는 숲이라니 안심이 된다. 이 아름다운 숲이 자본의 이익으로 파괴될 일은 한참 동안 없을 테니까. 원래 이 산은 소나무를 심었었는데 병해충이 심해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보는 자작나무 숲이 가장 아름다웠다.

어디를 가든 전망대, 사진 찍는 곳 이런 규정된 장소를 무시했던 나는 제대로 된 풍경을 전망대에서 봤다.

규정이 우리를 구속하지만은 않는구나 하는 깨달음.



하늘을 향해 하얗고 길게 뻗은 나무속에서, 목을 길게 젖히고 봐도 하늘은 보이지 않는 완전한 숲 속에서,

마음을 다독이는 평화가 스르르 나를 찾아왔다. 묘한 기분이었다.



자작나무 숲이 끝나고 내려오는 길은 의외로 삭막했다.

비를 맞아 더운 김을 내뿜는 먼 산이 보이지 않았다면 더더욱 삭막했을 것이다.


자작나무 숲에서 빠져나온 느낌은 좀 아쉬웠다. 더 오래 그 하얀 숲 속에 머물고 싶었다.


내려가는 길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걷다가 갑자기 7코스라 쓰인 팻말이 보였다. "뱀, 진드기 주의"라고도 써있었다. 어쩌라는 거지. 가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또다시 너무도 호젓한 산길이 주는 두려움을 겪기는 싫었다. 지나쳐갔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가 7코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좁고 조용한 산길, 다시 자작나무가 보인다.

평지와 내리막을 반복한다.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내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거미줄이 계속 얼굴에 걸리는 걸 보니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다.

그래도 길은 아름답다. 한참을 걸었다. 길이 나있는 그대로 걷다 보면 처음 시작했던 곳이 나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걷고 또 걸었다.



산이 깊을수록 가을은 가까이 와 있었다.



하늘은 비가 내릴 듯 흐려지고 길은 내리막길과 함께 전나무 숲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내려오니 어느 순간 넓은 길이 나왔다. 넓은 길을 걷는데 이상하게 낯설면서 익숙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처음에 걸어갔던 산 아랫길이었다.


산을 돌고 돌아 시작점으로 온 것이다.




숲에서 나오니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고 싶었다.

"산채 비빔밥"이라고 써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홀이 아닌 바깥쪽에 앉으며 주문을 했더니 나이가 지긋한 주인장은 그 자리는 음식 들고 가기 불편하니 안으로 들어 오란다. 자작나무 숲이 보이는 자리에 앉고 싶은 나는 그냥 바깥에 앉겠다고 했다. 살짝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음식을 들고 오시길래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좀 볼품없는 밥상이었다. 거무튀튀한 나물 몇 가지가 들어있는 비빔밥과 익은 오이 김치는 투박하고, 된장국은 맛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헹군 묵은 김치가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일단 배고프니까 먹자 라고 생각하며 비벼서 한입 먹었다.


헉...

말린 나물과 참기름의 고소하고 깊은 맛이 조화롭게 입안 가득 퍼졌다.


오...

조금만 먹고 남기려고 했는데 홀린 듯 퍼먹었다. 익은 오이 김치를 하나 입에 넣고는 감탄을 했다. 아삭하면서 시원한 맛. 정말 맛있었다! 비빔밥과 반찬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행복감이 밑바닥부터 밀려왔다.

다 먹은 쟁반을 들어다 주방에 놓고 계산을 하면서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고 깊이 인사를 했다. 무뚝뚝한 주인장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비친다.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내가 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고 만난 사람도 몇 명 없었다. 그런데 뭔가가 내 안에 꽉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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