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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y 04. 2024

제주의 길, 바람, 들판

즐거운 출장이라니!

제주로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이런저런 업무에 치여 힘들던 시기였는데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서 반가웠다. 일반적으로 출장은 부담을 안고 가게 마련인데 제주로 출장을 간다는 사실에 주책없이 마음이 두근거렸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라 일찍 출발했더니 아침시간에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 특유의 흐린 날씨였지만 흐리거나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제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기에 몇 백 날의 숨을 몰아 쉬며 공기를 마음껏 마셨다.



회의하러 가는 길에 본 마늘밭, 당근밭


흐린 하늘 아래 이 정도 선명한 초록을 낼 수 있는 건 현무암과 맑은 공기 때문이리라.



세계유산 축전 기간이라 이러한 길 표시를 많이 볼 수 있었다.


하늘색 점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려준다. 단순하면서 뱀과 길을 형상화한 표지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길을 걸었다. 내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그저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을 걸었다. 행사를 추진하는 시스템을 살펴보는 것은 업무의 영역이라 세심히 살펴보고 열심히 걸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길, 이 정이 내 인생일 것이다.   



세계유산 축전 기간에만 공개하는 용암동굴.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 쌓인 모래로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때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해설사의 설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동굴이 주는 태곳적 쓸쓸함과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불어오던 바람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입구에 드리워진 풀들이 묘한 원근감을 준다.


나는 여기에 있고 저 깊은 곳에 어떤 세상이 있을 듯한 아득한 기분... 하루키의 "1Q84"에서 처럼 달이 두 개 뜨면 중간지대로 가듯 가끔 퇴근하면서 구름의 음영이 깊거나 노을이 특이한 형태로 지는 날에는 나도 아오마메처럼 일상에서 갑자기 중간지대로 이동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우리가 이런저런 풍경에 한눈을 파는 사이 엉뚱한 길로 들어섰던 것 같다.


뒤따라오던 사람이 우리에게 가는 길을 알려준다. 제주에 이렇게 사람이 없던 날이 있었나 싶게 인적이 드문 날이었다. 덕분에 제주의 바람과 들판, 하늘과 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제주 밭담


이 돌담을 밭담이라고 하는데 밭을 일구면서 나오는 돌(현무암)로 담을 쌓은 것으로 쌓는 방법이나 위치에 따라 겹담, 외담, 돌담, 산담, 밭담, 견치담 등으로 부른다.


제주밭담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세계 중요 농업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가치가 높다.


얼기설기 쌓은 듯이 보이지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세월을 버티고 있는 돌들 사이로 바람과 풍경이 오고 간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설치미술.


익숙한 세상에, 늘 하던 발걸음에, 일상을 맴도는 생각들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지는 게 예술일지도 모르겠다.



화산섬 제주의 돌과 생명의 길을 걷는다.


흐리고 가는 비가 내리고 앞서가는 이들의 우비가 바람에 날리며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저들의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면 들판과 바람만 남을 것이다.



이 단순한 풍경이 내 마음을 잡아 두었다. 한참을 서 있었다.



월정리 해변

바다와 하늘 그리고 돌. 희푸른 도화지에 검은 돌을 그려 넣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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