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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Apr 20. 2024

비자림 가는 길

걸으면 보이는 것들

다랑쉬오름에서 내려와 비자림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는데 자꾸 다랑쉬오름을 다시 도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우리를 다랑쉬 오름이라는 원안에 가둔 듯한 느낌을 안고 계속 걸어갔다.


길은 아름다웠고 고즈넉했으며 날씨는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마침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걸어왔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느낌이 맞았다.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나가야 한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함께 가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급할 것이 없는 느린 걸음이고 그들은 트레킹을 하듯 빠른 걸음이니 금방 차이가 나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되돌아갈 때의 왔던 길은 새로운 길이었다. 햇빛의 방향이 다르니 풍경도 다르게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넓은 평지의 갈대밭지나 숲으로 들어갔는데 "무연고 묘지"라고 희미하게 쓰여 있는 나무 팻말이 보였다. 문득 제주 4.3이 떠올라 마음이 서늘해졌다. 조용히 명복을 빌며 조심스레 지나왔다.


제주는 4.3 희생자들의 거대한 무덤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이렇게 함부로 밟고 다녀도 되는 건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제주의 깊은 아픔이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음에 오면 4.3 평화공원에 꼭 가리라 다짐했다.



등 돌린 간판이 변심한 애인처럼 보이는 건 내가 너무 지쳐있어서일까...


큰길로 나와 한참을 걸으니 수확을 끝낸 당근밭이 보인다. 견고하게 쌓은 밭담 아래 수확하고 버려둔 상품성 없는 당근이 곳곳에 놓여있다. 제주에서는 이조차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몇 개 주워서 숙소에 가서 먹을까 하다가 이 밭을 가꾼 이들의 수고로움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내 것이 아닌걸...



당근밭과 다랑쉬오름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겨울에도 봄을 품고 있는 제주의 매력적인 모습이다.



다랑쉬오름에서 비자림 가는 길.


갑자기 맑아진 하늘과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친구 삼아 지나가는 차가 없는 차도를 큰 대자로 마음껏 걸어갔다.


늘 차가 주인이던 이 길이 잠깐이지만 사람이 활보할 수 있는 길이 된 것이다. 통쾌했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만난 동백나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꽃다발 같다.

제주의 동백은 11월부터 2월까지 꽃이 핀다.



비자나무 잎과 열매

입구에서 점심으로 고기국수를 먹고 비자림에 들어갔다.

비자림의 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며 한국과 일본에서 자생한다.

전북 내장산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의 낮은 산에 서식하는 나무로 '비자(榧子)'는 잎이 '아닐 비(非)'자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자나무는 현재 남해안 및 제주도에서 드물게 자라는데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선 비자나무, 하나의 우주를 이룬 듯 장엄하다.



동백꽃이 지고 있다. 지는 동백은 돌담에 떨어져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제주여행 둘째 날은 길을 헤맸고 예정보다 훨씬 많이 걸었다.


숙소에 가려면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 온몸에 피로감이 엄습했다. 마침 편의점이 있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편의점 야외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맥없이 먹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주의 풍경위로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다. 초록의 월동무 밭에도 떨어진 붉은 동백꽃 위에도 눈이 내린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눈이 내리네...'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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