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하는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로 내려간다. 폭설이 내린 그곳에서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난다는 데까지 읽으니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 동북쪽을 걷기로 했다. 숙소는 비자림과 다랑쉬 오름 사이로 정했다.
버스를 타고 1100 고지로 갔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환승을 했다. 희끗한 눈이 날리는시내를 벗어나 한라산 1100 고지로 들어서니 숲과 도로에 눈이 쌓여 있고 눈발도 점점 거세어진다. 중턱 정도 올라갔는데 내려오던 차 한 대가 눈길에 미끄러졌는지 꼼짝을 못 하고 서있다.
뒤따라오던 차들이 멈춰서 있고 올라가던 차들은 그 차를 피해 돌아가다 미끄러져멈춘다. 차들이 대책 없이 엉켜 있어 버스도 올라가지 못하고 모두 일시정지 화면처럼 서있다. 버스 승객은 열 명 정도. 어리목 입구에서 탄 등산복 차림의 부부가 내려오지 못하고 멈춰서 있는 운전자를 큰소리로 비난한다. 승객들 모두 밖을 내다보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때, 버스 운전기사분이 내리더니 버스가 미끄러지지않게 모래를 뿌리고 나서 멈춰서 있는 운전자에게 가서 뭔가 한참 말을 한다. 그러고 나서 엉켜있는 차들을 수신호로 조금씩 움직이게 해 주고 버스로 돌아온다.
등산복 차림의 부부가 묻는다.
"저 차는 왜 안 가는 거예요?"
"얼어버렸어요"
"엔진이요?"
"마음이요. 마음이 얼어서 꼼짝을 못 하고 있어요"
버스기사님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차들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가고 하나씩 내려오도록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공간이 생기자 버스를 출발시켰다. 출발하면서 보니 그때까지도 꼼짝 못 하고 서있는 마음이 얼어버린 운전자. 안타까웠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그 당혹스럽고 막막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얼어버린 마음이 풀리기를...
버스에서 내리니 눈보라가 휘몰아쳐 걷기도 힘들었다.
차들도 비틀비틀 사람도 비틀비틀. 강풍에 눈도 내리고 있었다. 일단 점심을 먹기 위해 휴게소로 들어갔다.
따뜻한 밥을 먹고 나니 추위가 가시고 바깥 풍경을 볼 여유가 생긴다.
휴게소에서 바깥 풍경을 보았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라산의 겨울풍경! 상고대가 맺힌 나무들이 울컥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1100 고지 들어가는 입구. 겨울의 1100 고지는 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천천히 걷는다.
하늘은 흐리고 급기야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나무와 물가에조용히 눈이 쌓인다.
한때는 초록이었을 잎사귀에도 쌓이고 검은 돌에도 쌓인다.
눈서리가 낀 겨울나무들이 주는 감동이 있다.
눈이 그치고 하늘이 다시 갠다. 제주다운 변덕스러운 날씨다.
습지는 넓지 않아서 천천히 걸어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가 있다. 돌아 나오는 길, 눈이 더 내려 검은 돌은 흰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습지를 다 돌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이 세차게 내린다. 박대기 기자가 나타날 것 같은 눈보라다. 제주의 버스정류장은 바람 때문인지 삼면이 닫혀있고 한쪽면만 출입을 위해 열려있는 구조이다.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정말 고마운 정류장이다.
그런데도 눈보라가 세게 치니 정류장 사이사이로 바람과 눈이 들이쳐서 정류장 안에 서있는 우리는 순식간에 눈사람 비슷하게 되었다. 털어내도 털어내도 다시 온몸에 눈이 쌓이니 털어내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다.
다행히 버스는 시간에 거의 맞춰 도착했다. 1100 고지에서 다랑쉬오름 근처 숙소까지는 버스로 2시간 40분이 걸린다. 중간에 환승하는 제주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장을 보고 버스를 타려니 무거운 짐과 버스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걸어 들어가는 40분 넘는 길이 걱정되었다.
때마침 숙소 주인장이 눈이 많이 오는데 잘 오고 있냐며 차가 없다니 데리러 나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짐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니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눈보라가 거세다. 주인장이 나와주지 않았다면 곤란한 상황일뻔했다. 숙소로 가는 동안 주인장은 제주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세심히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