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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Apr 27. 2024

제주의 바다:평대리에서 월정리까지

바다를 보며 걷고 또 걷는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제주 동쪽 바닷가 길인 평대리에서 월정리까지 걸을 작정이다.


숙소 주인장이 평대리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근데 우리가 걸어갈 거라고 한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을 알려준 듯하다. 걷는데 이상하게도 바다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정말로 반대로 가고 있었다. 너무 많이 걸어와서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불러 타고 평대리 해변으로 갔다.



갑자기 만난 바다는 내가 가진 불필요한 감정들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이 바다를 본 것만으로도 태어난 가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내내 제주 바다 위 떠있는 몽실하고 포근한 구름이 우리를 쫓아왔다.

구름을 보면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여주던 그림'눈사람 아저씨'가 떠올랐다.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레이먼드 브릭스의 '눈사람 아저씨'는 글이 없는 그림책이다.

아이가 자신이 만든 눈사람과 하늘을 나는 모습은 너무도 따뜻해서 눈사람이 녹는 걸 걱정할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보아도 그렇고 늘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쓰면 몇십 권은 나올 거라고 말씀하시는 엄마를 봐서도 그렇고 나 자신의 살아온 삶을 봐서도 그렇다.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 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 김지수『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구름과 바다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뚝방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있었다.



걷고 또 걷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살면서 가끔 뒤돌아보았던가, 그때 나는 무엇을 보았나...


가끔은 돌아보고, 멈추고, 숨을 깊게 쉬며 살아갈 것이다.



겨울의 바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바람을 헤치고 걸어서 월정리 바다까지 왔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걸었더니 온몸이 얼얼하다.


좀 쉬어갈 시간이다.

카페에 들어가 바다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의자가 창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앞만 보면 혼자 있는 느낌이다.


사람을 만났을 때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부담스러웠다. 특히 낯선 이성을 만날 때는 더욱 그랬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수선화가 피는 4월의 어느 봄날,

소개팅을 했는데 만나는 장소가 찻집이 아니고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대학교 정문 앞에서였다.

교정을 나란히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초면에.


소문난 노처녀였던 내가 결혼을 한 것은 마주 보지 않고 옆에서 대화를 나눈 덕분(?) 인지도 모른다.



제주공항에 해가 진다.


돌아와서 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마저 읽었다. 가슴을 책으로 누르고 한참을 있었다. 너무 먹먹해서...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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