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단순한 삶 03화

나의 책들이여 이젠 안녕

책을 정리했다.

by 정안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라 책은 대부분 빌려 읽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와 당시 반마다 책을 기증받아 교실 뒤편에 만들어 놓은 학급 문고에서 어두워지도록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책은 나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슬프고 불행한 삶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어쩔 줄 모르던 나는 책 속으로 도망쳤다. 다락방으로 책을 들고 올라가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이사를 가면서 세로글씨로 된 한국문학전집을 주고 갔는데 그 책으로 한국 근대문학 단편들을 대부분 읽었다. 내 책이 생겨서 얼마나 좋았는지 밥 먹으면서도 읽었었다.


어른이 되고 돈을 벌게 되면서는 주로 책을 사서 읽었다.

다 읽고 차곡이 쌓이는 책이 나의 재산인양 뿌듯하고 사랑스러웠다. 결혼을 하면서 내소유의 책들은 다 가지고 왔다. 심지어 대학 때 교재로 썼던 책까지도 챙겨 왔다.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책의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직장에 다니느라 함께 해주지 못한 시간을 잠자기 전 침대에 누워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더 많은 책을 샀고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고 또 샀다. 아이방 벽면 한쪽이 책으로 가득 찼다.


어느 날 유치원생이던 아들이 동화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머리 아파”. 그때는 몰랐다. 많은 책이 아이에게 압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만 꽂아놓고 가끔씩 새로운 책으로 바꿔 주어 아이의 흥미를 유발한다는 요령이 있다는 것도...


두 번의 이사를 했지만 거의 버리지 않고 모든 책을 분신인양 가지고 다녔다.

언젠가 "거실을 도서관으로"라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다. TV를 치우고 거실을 책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나도 기뻐하며 동참했다. TV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거실 벽면 한쪽을 커다란 책장으로 채우고, 남은 책은 베란다 한쪽 벽면에 정리했다. 그러고도 책이 남아 방마다 공간이 있으면 낮은 책꽂이를 놓아두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의 주인은 책이었다.

그렇게 책의 높이는 나의 허황된 이상처럼 올라갔다. 아이들은 만화책만 읽어서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나 또한 읽는 속도가 새책을 사 모으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는데 누가 많이 읽으면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면서 읽은 책을 다시 제대로 읽은 것은 딱 세 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이다. “렉싱턴의 유령”은 언젠가 아이들과 스키장에 갔는데 나는 늘 그렇듯 매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지고 간 책을 읽었다. 거의 다 읽어 가는데 초록색 줄이 쳐진 곳이 몇 군데 나왔다. 전에 읽은 책이라는 것을 다 읽고 알았다.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와 “토지”는 다시 읽으니 처음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깊이 있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다시 읽을 것처럼 수많은 책들을 움켜쥐고 있었다.


책 정리를 시작했다.

책장 별로 모든 책을 꺼내 바닥에 두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두 종류로 분리했다. 남길 책과 보낼 책. 그런데 책을 고르면서 책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추억과 내가 그은 밑줄들과 간단한 메모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도 모르게 책 하나하나를 들고 그 메모와 밑줄들을 읽고 있었다. 아... 갑자기 모든 책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쓴 귀엽고 앙증맞은 그림일기와 어버이날 삐뚤빼뚤 써준 카드와 편지, 여행 가면 샀던 문구용품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언젠가 아는 직원이 문구점에 들렀다 간다고 해서 뭐 사러 가냐고 물었더니 네임펜 한 개 사러 간다고 해서 비웃었던걸 반성한다. 문구점에 가면 필요한 건 한 개인데 이쁘고 개성 있는 문구용품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것저것 샀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필기도구만 거의 100개, 쓰지 않고 쌓아놓은 다양한 크기의 노트 몇십 권, 드로잉 한다고 미리 사놓은 노트와 채색 도구들... 미쳤구나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책에 어린 소중한 추억과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는 물건들을 보며 판단이 흐려졌다...


이러다가는 정리 못한다! 그래서 마음을 딱 먹었다.

"책은 다시 읽고 싶은지 아닌지, 문구는 최소한으로 쓸 만큼만, 추억은 물건이 아닌 기억으로 남기자"


그랬더니 조금 수월해졌다. 한자가 섞여 있는 책, 갱지로 된 오래된 책, 다시 읽을 마음이 없는 책들은 모두 보낼 책으로 분류했다. 두 종류의 분리가 끝난 후 남길 책을 하나밖에 없는 책꽂이에 꽂으며 다시 기준을 세웠다.


책꽂이 칸은 딱 네 칸. 맨 위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 몇 권, 둘째 칸은 내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문득 꺼내서 몇 줄이라도 읽고 싶은 책, 세 번째 칸은 아직 읽지 않았거나 읽고 있거나 다시 한번 읽어야 할 책, 네 번째 칸은 절친에게 대출해 줄 책(원한다면 줄 수도 있는 책). 그 한 칸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게 했다. 넘어갈 때는 보낼 책으로 다시 분류했다. 내 책들은 이제 이 칸을 유지하고 궁극에는 책장을 줄이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보낼 책을 다시 나누었다.

조카나 지인에게 줄 책, 중고서점에 판매할 책, 버릴 책으로 나눴다.


조카들의 나이에 맞고 읽을만한 책을 우선 골라서 박스에 포장해서 차 트렁크에 실어놨다. 며칠 내에 동생 집으로 배달해 줄 것이다. 판매할 책은 알라딘 인터넷 중고서점에 들어가서 판매 가능 여부를 조회해서 팔기 신청을 하고 박스에 포장해서 단자함에 넣어 두면 늘 고마운 택배 기사님께서 가져가실 것이다.


버릴 책은 분홍색 노끈으로 꼼꼼하게 묶어 재활용하는 날 내어 놓으려고 거실 한구석에 주욱 쌓아놨다. 보여야 잊지 않고 버리기 때문이다.


필기도구는 하나하나 테스트해봐서 나오는 것만 분류해서 집에 조금 남기고 나머지는 사무실로 가지고 가서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도 사용했다. 쓰지 않은 노트와 문구용품은 아이들이 어린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책을 처분하니 책장이 남았다.


우선 가장 실용적인 것을 책장용으로 한 개 남겼다.

또 하나는 창고정리를 위해 남겼다. 길이가 높고 단순한 책장은 창고 정리에 아주 유용하다.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보이도록 수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가까이 사는 친정 식구들에게 카톡으로 책장 사진을 올려 필요하다는 것은 집으로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버렸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배달 서비스는 주는 사람에게는 정리의 신속한 마무리를 위해 좋고 받는 사람은 배달해주니 만족도가 높다.


이제 나는

집에 있는 읽지 않은 책을 먼저 읽고, 꼭 사고 싶은 책은 읽은 후 바로 알라딘 슈퍼 바이백으로 팔아 책의 수를 늘리지 않기로 했다. 문구점 갈 일도 없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여행을 가도 잡동사니에 눈길만 주지 손길은 주지 않는다.


정리를 하고 어느 날 남편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전에도 종종 놀러 오던 친구였는데 그날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마디 했다. "이렇게 전망이 좋은 집이었어???"


가득 찼던 물건들을 걷어내니 비로소 집과 풍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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