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달리고 싶다.

disabled person

by Sabina

장애인들의 직접적인 경험에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장애가 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알 방법이 없으며, 경험을 하더라도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 이해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삶의 질에 대한 논의에서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장애를 손상의 측면에서 강조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장애인들의 삶의 질이나 만족도가 실제보다 더 낮다고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장애인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진술에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하여 장애에 대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이들을 위한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송 관계자의 언어는 지식백과에 담긴 정의를 활자처럼 읊었다. 내가 들어도 채널을 돌리고 싶은데,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진짜 장애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은, 탁상론에 불과하니 누가 들어줄까...


책을 출간하고 한동안 나를 닮은 장애인들이 상담실을 찾았다. 그들의 고통을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 특히 장애를 가진 여자들은 내가 경험하고 내가 도전하는 분야가 불가사의하다고 했다. 장애인 카레이서를 꿈꾸며, 번지점프를 하고 싶어하며 독일 아우토반을 찾아가 달리고 싶다는 장애인 상담사의 글과 언어가, 실현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도 있잖아요. 저보다 더 강한 열정과 도전의식을 가진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책 출간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지고, 강연과 상담이 줄어들다보니, 단호한 어조로 도전의식을 뽐내던 나의 삶은 지지대가 무너진 낡은 천장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고여있는 물에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계속 침잠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업의 자리로 돌아가 글 쓰는 작가의 자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으로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수업을 했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식사 때를 놓친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면 다이어트 한다고 사놓은 닭가슴살을 데우기도 귀찮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선생님은 complex가 뭐예요?"

"없지."

수업이 방금 끝났다. 아직도 남아있는 단호한 선생님 말투로 학생의 질문의 의도를 묵살시켰다.

수업을 하고 라면을 끓여먹고 있지만 당당하다고, 불편한 몸이지만 스스로 살림을 잘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액션인데 그 녀석은 재차 물었다.

"왜 장애인을 disabled person이라고 할까요?"


'complex는 잘못된 표현인 거는 알겠는데, disability는 능력이 없다는 뜻 아니에요? 선생님은 능력이 있잖아요...'


이미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나는 그녀석의 질문에 오해를 하지 않는다. 그 녀석은 진지하게 영어 단어보다 강한 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말이지... handicap 정도는 있어. 다소 불리한 정도?"



그 날, 미묘하게 건드리고 애매하게 우울한 날, 보보스 작가의 글을 읽었다.

1킬로미터, 정말 의욕이 없을 때는 조깅화만 신자라고 주문을 외운다. 휴식의 달콤함이 뇌의 지방으로 변해 생각을 무디게 만든지 오래, 이런 작은 결심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엉덩이를 걷어차는 원동력이 된다.(...)
햇빛이 드문드문 비쳤다. 오르막길을 다 오르자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프로 마라토너가 된 것처럼 심장이 가볍게 그 속도로 뛰었다. 아무도 없는 이 길, 촉촉한 잎사귀, 자갈, 그리고 내 마음, 내 심장이 경쾌하게 뛰었다.{힐링스페이스/BoBos]

유독, 내 주변에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글에 댓글을 달 때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까먹을까 신경을 쓰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쓴다.

가령 "뜨거운 글입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달리고 싶습니다."


장애인 내담자는 운동 채널이나, 자기가 할 수 없는 영역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다르다. 할 수 없는 영역, 그것이 익스트림해서 정상인도 하기 어려운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일부러 찾아본다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다 못한다는 의식의 변화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 내 삶의 결과물로 드러나고, 나를 찾은 내담자의 변화로 드러날 때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달리는 사람과 도전하는 사람이 좋다. 그 사람의 에너지가 전이되는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덩달아 같이 뛰고 같이 행동한다. 아래 글을 보자.


혼자 산책을 즐기게 된 건 코로나 이후의 습관이다. 그전에는 집단의 힘, 돈의 힘을 빌려 요가나 헬스, gx를 하면서 최소한의 운동량을 맞추었다. 하기 싫어도 수업료를 내고 나면 또 움직이게 됐다. 홈웨어를 벗고 외출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으면 그날의 반이상은 성공한 거다.(...)생각의 힘을 기르려고 한다. 생각의 총량이 부족하다. 집중력이 흩어진다. 유튜브나 sns에 한눈이 팔린다. 오롯이 생각에 집중하고 싶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의식의 흐름이 이끄는 대로 가보려고 한다.(...)산책이 그 솔루션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힐링스페이스/향유]

댓글을 썼다.

"산책하고 왔습니다."

달리고 싶다는 댓글은 쓰지 못했지만, 산책했다는 댓글은 썼다.


애매하게 영어 단어로 나를 건드렸던 제자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날, 말했다.

"맛있지? 라면 잘 끓이지?"

"네!"

"내가 말이지, disabled person이 아니라고, 약간 불편하게 살고 있는 handicap이 있을 뿐이지!"

그 녀석, 신경도 안 쓴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면치기를 할 뿐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역지사지'를 영어 관용어로 풀면 이렇다.

"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

네 자신을 나의 신발에 넣으라는 이 문장은, 다른 사람의 상황에 나의 감정을 대입하여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공감의 영역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하는 영역이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일 수 있다. 그것이 신체적 결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그리고 살아온 환경, 그리고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일 수 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껴주는 공감은 한 사람을 살리는 귀한 영역이다.


'운동' 모든 영역을 좋아하는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스포츠'분야이다. 장애가 있어서 운동은 할 수 없지만, 보고 느끼고 뜨거워지는 심장의 소리는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의 심장과 같다.


산책을 하고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마음이 뜨겁다.

산책 글을 쓴 작가의 동선을 따라 커피 향이 가득한 골목을 걸었고, 달리기를 한 작가가 조깅화 끈을 묶는 것처럼 신발 끈을 조여매고 다짐했다.


"오늘은 달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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