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도 아닌 깜빡거림이 몸을 끕니다. 어디로인지 내 혼은 빛깔만이 아른거리는 강을 건너 당신을 찾아갑니다. 죽음과 유형의 시간이 가까워 옵니다. 환영이 되어 저를 안아주시던 당신은 이제 오지 않습니다. '<<렌의 애가>>
외로움이 고립의 공간과 맞물리고 고요한 공간에 조용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면 첫 사랑 남자가 가끔, 아주 가끔 등장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감았던 눈을 뜨면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이 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꿈'에서 '현실'로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피곤함이 몰려온다.
육십이 넘은 내담자는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투피스를 입고 왔다. 남편의 폭언과 무시에 익숙해질 나이인데도 여전히 이혼을 꿈꾸고 아직도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던 첫남자가 생각난다고 했을 때, 나는 살며시 육십이 넘은 내담자의 손을 잡아드렸다.
"방곡리로 들어서면 함양 구간에서 산청으로 지역이 바껴요...임천으로 합류하기 직전에 오봉천이 있는데..." 들어도 알리 없는 지명을 눈을 감고 이야기할 때,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물에 얽힌 거 같아요. 맘과 몸을 꼼짝 못하게 했어요. 남편이 힘들게 할 때마다 첫 남자가 떠올라요. 그 사람하고 걸었던 지리산 오봉천이 떠올라요. 거기를 걸으면 숨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쏟아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시각화 작업에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단어는 '지명'이다.
목발 하나로도 충분히 잘 걸었던 스무 살, 첫 사랑 남자와 걸었던 부산 해운대는 모래가 깊었다. 기울어지듯 쓰러지는 나를 부축하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만들어내는 주황빛 노을 아래 그는 나를 업었다. 나를 버린 남자인데도,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눈을 감으면 그 풍경이 꿈처럼 펼쳐진다. 나에게 '부산'은 이루지 못한 '꿈'이며 숙명처럼 안고 갈 운명이었다.
"아직도 예쁘세요. 갇힌 세계에 살기에는 살아갈 날이 많으세요..."
"벗어날 수 있을까요...지겨워요."
빈둥지 증후군이라고 한다. 다 키워놓은 자식들은 마치 자기 스스로 큰 양 부모와 담을 쌓고 찾아 오지 않는다고 했다. 여전히 폭언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하고는 각 방을 쓴다고 했다. 큰 방 침대에서 재방송으로 틀어주는 드라마를 몇 편을 봤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겨우 잠이 들면 자꾸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고 했다. 아침이면 흥건하게 늘어진 몸에 말라버린 다리를 보면서 '살고싶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걸을 수 있을 때, 건강하실 때, 가고 싶은 곳을 다녀야해요. 지리산 오봉천을 찾아가서 숨을 쉬고 오세요..."
엄마와 함께 살 때, 새벽까지 수업을 하고 지친 몸을 샤워로 씻겨 낸 그 야심한 시각에도 가끔 엄마 방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방문을 열어보면 엄마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아마 그 때 나이가 팔십이 넘었지...
그 엄마에 그 딸이 아니랄까, 지천명이 넘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로맨스'이고 이십대 아니, 심지어 십대들이 등장하는 '쇼미더머니'라든지 '하트시그널'이라든지...뭐 그런거에 심취해 있으니 엄마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나가듯 물어보면 엄마는 부인하지 않았다.
"엄마, 엄마 나이에도 남녀가 사랑하는 장면을 보면 부끄부끄해요? 감정이 살아나요?"
"이년아, 구십에도 사랑할 수 있어. 남자만 데리고 와라."
황해도 해주 출신 엄마의 구수한 욕설이야 이제는 애교로 들을 수 있지만, 남자를 데리고 오란다.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도도하고 우아하게 고스란히 여자 가장의 몫을 다하며 30년을 넘게 혼자 사신 분인데,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침묵 속에 혼자 춤을 춘 것처럼, 내가 꿈꾸듯 부산 해운대 남자와 손을 잡기 위해 눈을 감은 것처럼, 엄마도...지리산을 가고 싶어하는 내담자도 외로움의 계절을 감고 있는 여자여서, 아직도 여자여서...그래서 로맨스를 꿈꾸고 있어서 마음이 어수선한 현실을 벗어나 먼 곳 지리산 종점을 찾아가고 가기 싫은 곳 해운대 모래사장에 머물었다.
'당신은 호사스러운 슬픔의 소유자이십니다. 나에게도 가림 없는 당신의 마음을 써 보내 주십시오. 나의 신뢰를 받아주시고 그 신뢰에 금이 가지 않도록 나는 당신의 명예와 출세의 욕된 그림자는 만지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만날 수는 없을까요? 참을성이 없는 렌이라고 호된 나무람을 하신대도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에 나의 존재를 의식합니다.'<<렌의 애가>>
육체가 타오르고 끈끈하게 잡아당기는 더 큰 눈과 더 큰 가슴의 종결성은 없다. 근육이 사라진 다리에 파란 실핏줄이 보이고 많이 걸을 수도 없어서 살갗의 결이 만지면 부서지는 두부와 같을지라도 여자는 여자인가 보다. 구십을 바라보는 엄마도 육십이 넘은 내담자도, 그리고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된지 5년이 되어가는 나도 '사랑하고 싶다' 라고 말했다. 고의 같은 심술성이랄까. 사랑을 논하는 자리에서 꼭 이 사례를 들어 나이가 들어도 사랑할 수 있다고 눈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혼의 로맨스'라고 하면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는 커플을 예로 들거나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그 세월이 지나, 이제는 오십에도 육십에도 칠십에도 사랑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커플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불륜인지 부부인지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머리가 희끗하게 간혹 더 하얀 머리카락을 소유한 커플이 손을 잡고 걸으면 더 아름다워보여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이른바 '실버시대'가 되었다.
그래도 오십에 육십에 칠십에, 나이와 더불어 지혜가 들어 간 연륜의 어르신들이 렌의 애가에 등장하는 사랑의 고백을 말하면 스무 살이 서른 살이 그리고 십대들은 경청하지 않았다. 세월의 녹진함에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 지중해 빛 제주도를 걷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제 좀 자유롭게 잊었던 남자를 추억하고 그와 걸었던 장소를 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신체적 강인함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장애가 있어서 장애인을 이해하고, 어쩌다 이혼을 해서 이혼녀를 이해하는데, 이제는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해서 나는 줄곧 말했다.
"문을 열고 나가셔야해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어둠이 짙어 오는 밤, 어느새 어린 별들이 눈을 뜨기 시작하면 총총한 별빛에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긴 한숨으로 청춘을 추억하는 황혼들이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데,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으로 둘레길을 걸으며 임영웅 노래를 그 누군가와 같이 부르고 싶다고 한다. 육십대 내담자가 좋아하는 노래가 임영웅의 '어느날 문득'인데 내가 기억하는 정수라의 '어느날 문득'이 그녀의 추억과 그녀의 마음을 닮아서 상담이 끝나고 내 플레이 리스트에서 그 곡은 반복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어느날 문득 돌아다보니/지나온 모든 게 다 아픔이네요/날 위해 모든 걸 다 버려야하는데/아직도 내 마음 둘 곳을 몰라요/ 오늘도 가슴엔 바람이 부네요/마음엔 나도 모를 설움이 가득/어디로 갈까요 어떻게 할까요/아직도 내가 날 모르나봐요/언제쯤 웃으며 날 볼 수 있을까/ 그땐 왜 그랬을까 그땐 왜 몰랐을까/사랑에 이별이 숨어있는지(...)
예전에는 이런 관용어가 유행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이제는 그런 수식어 따위는 필요가 없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묻어 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시대가 왔다.
'국민가수' 10대 소년의 입에서도 이렇게 구성 진 '어느날 문득'이 완성이 되고 결국 구십을 바라보는 나의 노모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구십에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가서 할아버지 좀 데리고 와라..."
사랑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나보다. 외로운 감정은 누가 채워 줄 수 없나 보다. 아주 흠뻑 취했다가 빠져 나오면 다시 웃으면서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있으니 말이다. 황혼의 로맨스를 채워 줄 대상을 구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나는 끊임없이 추억을 살려 낼 노래를 틀어줄 것이다.
육십대 내담자는 결국 지리산 둘레길을 찾아갔다.
"선생님, 많이 변했네요. 그래도 사철나무 위를 스치는 바람은 여전하고 낮에 걸린 해 그늘은 여전히 깊네요..."
그녀의 시적인 문자에 가슴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황혼의 그녀가 기울어가는 석양하늘을 바라보고 마음 껏 울고 왔으면 좋겠다고...
이제 나는 황혼의 로맨스를 응원할 수 있는 또 다른 경험을 소유했다. 나의 이력이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