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줄을 의심하라

국어사전은 마지막까지 필요하다

by 나른히

투고한 원고를 살펴볼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빨간 줄’이다.

한글이나 워드 프로그램에서 맞춤법을 맞추기 위해 잘못된 글자나 단어를 잡아내는 빨간 줄. 그런데 이 빨간 줄이 오히려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들 수 있다.


원고를 열어보았을 때 빨간 줄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면, 먼저 ‘퇴고해서 보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생각보다 퇴고 없이 즉흥적으로 원고를 작성하여 보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고를 살펴볼라치면 안도감은 금세 사라지고 불안감이 엄습한다. 빨간 줄을 없애고자 했던 투고자의 노력이 도리어 원고의 상태를 안 좋게 만든 경우다. 다시 말해, 빨간 줄을 지우기 위해 ‘잊혀 지다’ ‘쓰여 지다’ ‘비춰 지다’처럼 맞춤법과 상관없이 무작정 단어를 띄어 쓰고 문장 전체에 관한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빨간 줄만 없애면 된다’는 무의식이 오히려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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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업계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출판사에 편집자로 일을 시작했을 때, 불행히도 나의 첫 출판사는 일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주지 못했다.

알아두어야만 하는 몇몇 업무 수칙을 제외하고 교정이나 편집에 관한 것들은 당시에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어디에 물어보기에도 힘들었던 상황에 나는 무작정 교정 작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원고의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국어사전에 검색하는 것이었다.


무식한 방법이라기엔 ‘국어사전에 모두 검색하기’는 생각보다 효율이 높았다.

첫째, 시간이 절약된다. 내가 맡았던 저자 대부분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래서 틀린 단어를 하나 찾아내면 그 단어를 한꺼번에 바꾸면 되니 덕분에 교정에 드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둘째, 다양한 단어를 쓸 수 있다. 작가가 원고를 작성할 때에는 떠오르지 않아 쓰지 못한 단어들이 유의어나 반의어를 통해 찾아지는 것이다. 또한, 특정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 경우에 단어를 다양하게 씀으로써 단조로웠던 글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셋째, 문장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은 투고자가 맞춤법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같은 형식의 문장이 여러 번 이어지는 경우를 발견하지 못한다.

넷째, 단어의 활용법까지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족’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동사나 형용사나 어울릴까? 사족을 국어사전에 검색하면 예문을 통해 활용법까지 알 수 있다.

Photo by Austris Augusts on Unsplash

사실 이 방법은 내가 원고와 거리를 두는 방법이기도 했다.

첫 출판사에서는 편집자가 보통의 단행본 출판사에서 맡는 원고의 두세 배 정도를 담당했다(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당사자인 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루에 3개의 원고를 교정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가며 의미를 찾아가기란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작가에게도 알맞은 방법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쓴 글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틀린 점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법이 해답이 된 것이다. 자연스레 원고와 거리를 두게 되니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많은 글쓰기 책에서 멋진 퇴고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국어사전에 모두 검색하기’라는 나의 팁이 이러한 퇴고 방법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편집자로 일해오는 동안 빨간 줄만 믿고 마지막 퇴고 작업을 거친 투고 원고들을 여러 번 만나왔다.

원고는 어느 정도 작성해 놓았고, 마음은 급하니 손쉬운 ‘맞춤법 검사’의 손을 빌리는 것이리라. 편집자는 이러한 투고자의 조급한 마음을 원고로 확인한다. 그러나 투고자의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원고 검토와 이후 출간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투고 메일을 보내기에 앞서 ‘국어사전’의 힘을 빌리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끝난 것 같은데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것’이 퇴고라고 생각한다. 투고하기 직전, 무언가 놓친 것 같다면 국어사전의 힘을 빌려보자.



커버 이미지: Photo by Joanna Kosinsk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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