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는 과연 쓸모가 있을까?
오래전 책 하나를 통째로 옮겨 적었던 적이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을 무시하고 베스트셀러라길래 샀던 책이 도통 읽히지 않았다. 덕분에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한 달 동안 옮겼던 기억이 난다. 나름의 쓸모를 찾으려고 재미있는 단어를 찾아내면 단어장에 따로 적어두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단어들을 내 글에 쓸 일은 거의 없었다.
필사는 정말 도움이 되었을까?
개인적으로 필사는 나에게 반절만큼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그 책을 읽어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으면 지금도 먼지 쌓인 채 책꽂이에 꽂혀 있었을 거다). 처음에는 웬만큼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책 내용도 낯선 단어들도 머릿속에 흔적만 희미하게 남았다. 돌이켜 보니, 책이 어려웠던 탓에 두세 번 읽어가며 썼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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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머릿속에 책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았던 책들은 ‘담당 편집 도서’, 즉 내가 담당했던 책이었다. 몇 달을 일로써 부둥켜안고 있었으니 당연히 오래 기억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책에는 몇몇 규칙들이 있었다.
1. 입으로 읽기
일할 때 머릿속에 도통 들어오지 않는 문장은 입으로 한번 읽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시나리오나 대본을 쓰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법한데, 입으로 술술 읽혀야 하는 것은 일반 단행본도 마찬가지다. 어색하지 않고 쉴 틈도 충분히 있을 정도로 문장이 다듬어졌을 때 편집자는 비로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 문장이 외워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2. 문장을 다시 써보기
그래도 어려운 문장은 문단 통째로 워드 프로그램이나 교정지 한쪽에 옮겨 적었다. 키보드를 이리저리 눌러가며, 또 지우개로 쓱쓱 지워가며 문장을 고치다 보면 결국에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어려운 문장을 이해될 때까지 계속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에 이 과정도 책을 기억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3. 발췌하기
편집자는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보도자료나 홍보 등에 쓰일 만한 부분을 차곡차곡 모아둔다. 그래야 나중에 보도자료를 쓸 때 그나마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다. 그런데 이 ‘발췌하기’가 나로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원고를 살펴볼 때마다 오탈자를 찾고 문장을 고치려고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마치 보물찾기하듯 마땅한 글을 찾아 헤맸는데, 이때 각 장마다 최소 몇 개 정도 찾자고 개수를 정해두었다. 개수를 채워야 하다 보니 계속 책 속을 뒤지게 되었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책을 상기하는 과정이 되었다.
4. 여러 번 읽어보기
편집은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교정교열 단계는 물론이고, 원고가 인쇄되어 종이책으로 나온 이후에도 편집자는 여러 용도로 책을 다시 펼친다. 아무리 여러 번 봤어도, 앞서 말한 과정을 반복했어도 200자 원고지 몇백 매에 달하는 텍스트는 머릿속에 오래 머물기 어렵다.
Photo by Reuben Juarez on Unsplash책을 눈으로 읽는 것도 모자라, 손으로 옮기며 다시 읽어내는 필사.
개인적으로, 필사는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눈으로 훑어가는 것보다 더 고되고 시간도 오래 걸릴 뿐이었다. 눈으로 읽어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나는 필사를 그만두었다. 다행히 그다음 책은 취향껏 고른 탓에 눈으로 읽어도 충분했다.
그러다 최근 다시 필사에 도전해보았다. 여전히 버겁지만, 어떻게 하면 책을 재밌게 필사할 수 있을지 궁리하다 보니, 내가 회사에서 글을 어떻게 살피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애초에 취향에 맞는 책을 골랐다면 힘들일 일도 없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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