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S의 상태가 좋아져 우리 집에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간 날, 나는 그녀의 회복을 바라며 기뻐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 S의 자해가 더욱 심해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S의 남편은 참다못한 끝에 극한의 상황에 이르렀고, 부엌에서 식칼을 뽑아 들며 "같이 죽자"라고 외치며 S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분노는 차가운 칼날처럼 S에게 날아들었다. S는 그 공격에서 신체적으로 다치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분노가 얼마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다음 날, S는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기로 결심하고 정신과를 찾았다. 그 결정은 그녀가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S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날이면, 그녀가 상담을 받을 때 나는 보호자로 동석했다. 그 시간이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소중한 순간이었다. 상담 중에는 선생님께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다. “선생님, S가 가끔 환상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건 S의 상상일까요? 아니면 진짜 영의 세계가 있는 걸까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요즘은 정신과에서도 영의 세계를 부인하진 않습니다. 다만, 환상을 보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도록,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셔야 해요.”
그 말을 듣고, S와 함께하는 삶이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 동시에, 그 삶의 무게가 내게 주는 의미도 느껴졌다. S와의 시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S에게서 느꼈던 시간을 음악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S를 만났던 그 새벽, 그녀의 눈빛에 담긴 고통, 그리고 발작의 버튼이 되는 시점까지, 모든 순간이 담긴 노래가 만들어졌다. 음악은 그 모든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고, S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통로가 되었다. 그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가 아닌,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해와 사랑의 편지처럼 느껴졌다.
그 노래를 우연히 들은 지인들은 나에게 앨범 제작을 제안했다. 몇 사람의 후원 덕분에 앨범 제작과 동시에 유통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내 음악은 내가 다닐 수 없는 곳곳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 노래는 교도소 담장 안을 넘어 재소자의 귀에 닿았고, 또 다른 날에는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군부대 철창을 넘어갔다.
앨범의 보도자료가 한국자살예방협회와 맞닿아 캠페인 취지로 협업 콘서트를 열게 되었고, 그 후로 나는 한국자살예방협회 홍보대사로서 여러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S와 함께 살아낸 삶을 노래로 만들었더니, 내 음악은 TV와 라디오 전파를 타게 되었고, 음악을 들었다는 사람들에게서 위로받았다는 손편지나 DM을 받게 되었다. S와 나는 ‘소울메이트’라는 팀을 만들어 앨범을 발매하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했다. 무대 위에서 S와 함께 노래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감싸는 깊은 연결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의 발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은 여전히 현실로 존재했고, 나는 그 고통과 함께 노래하며 힘을 주고 싶었다.
공연 후, S가 관객의 반응을 보고 웃음을 짓는 모습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지만, 나는 S의 곁에서 그녀의 아픔을 바라보아야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지만, S의 발작은 언제나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S의 마음이 버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