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나보고 죽으라고, 내 귀에 대고 옥상에서 떨어지라고 말해." 새벽의 어둠 속에서 전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S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잠이 채 깨지 않은 상태에서도 S의 혼란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S의 절망이 나를 감싸는 듯했고, 머릿속이 희미해지며 아득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쩌면 S가 멈추지 못할 곳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며칠 후,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시 울리는 전화벨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기이한 불길함이 엄습해 오는 가운데, 밖으로 나가보니 S가 집 앞 놀이터에 홀로 서 있었다. 바스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S의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를 입 밖으로 꺼내야 할 것 같았지만, 나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S는 아무런 짐도 없이, 허둥지둥 집을 나온 모양이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남편이 나를 밀어내고 현관문을 잠가버렸어… 돌아갈 곳이 없어서 여기로 왔어."
S는 종종 혼잣말을 하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듯 공허한 곳에 말을 걸었다. 어느 날은 내 주머니 속 동전이 몇 개인지 맞추더니,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붙잡고는 그들의 과거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그 모습이 점점 낯설고 무서워졌다. S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 도망치듯 물러났고, 나는 그런 S를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조차도 S의 한쪽 눈에 비치는 광기를 보며 때때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S가 말했다. “내 큰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신병을 앓았어. 그 병이 나한테 옮겨온 것 같아.” S는 자기가 조종당하고 있다고 했고, 나는 그가 느끼는 절박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S의 눈빛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묘한 공허함과 살기가 엿보였다. 마치 무당이 작두를 타며 트랜스에 빠진 모습 같았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S는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저 어떻게든 S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도원으로 향하는 길 내내, 죄어드는 불안과 희미한 희망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S의 떨리는 손끝, 멍한 시선이 모두 다급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구해줘.’
기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았다. S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쁜 기운은 물러가라, " 떨리는 목소리로 힘을 다해 외치며, S가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분히 눈을 감고, 가능한 모든 마음과 힘을 모아 S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기를 바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주변에 고요함이 감돌았다. 눈을 떠보니 S의 얼굴은 조금씩 평온한 빛으로 변해 있었고, 마침내 S는 숨을 고르며 잠들어 있었다. S의 잔잔한 숨결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S는 얼마나 힘들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S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기도와 곁을 지켜주는 것. 나는 그저 S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S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S는 나와 떨어지는 상황이 오면 자해를 했다. 벽에 머리를 박거나 가위로 자기 팔을 찔렀다. 그때마다 내가 S에게 달려가 할 수 있는 건 S를 꽉 안고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옷 한 벌 없이 집을 나온 S에게 나는 옷을 빌려주었다. 나보다 키는 10센티 이상 작았지만, 체구가 나와 비슷해 옷의 길이만 좀 길었지 품은 대충 맞았었다. 그런데 몇 달 후 내 바지를 입고 걸어가던 S의 골반에서 바지가 그대로 흘러내렸다. S의 몸은 그사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듯 S는 내적인 허물을 벗어댔다. S와 한 해가 지나고 마땅히 빌려줄 옷이 없어진 날에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인 것 같아,”라는 S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단단해 보였다. S는 그렇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S가 우리 집을 떠난 다음날, 나는 내 방에서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구급대원들이 내 방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내 곁에 다가와 빠르게 나를 들것에 실어 올리며, 구급차에 태우려 했다. "숨을 쉬세요!" 그들의 목소리는 불안과 긴장을 부추기는 소음처럼 들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구급차 안에 들어서자, 엄마 병실에서 맡았던 그 익숙한 냄새가 나를 압도했다. 나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와 기계음은 나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어! 빨리!” 구급대원의 절박한 목소리가 내 귀에 박혔다. 그 순간, 나는 나를 구타한 오빠가 119로 신고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