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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커피 Jun 01. 2019

2. 유럽인의 식탁에 초대 받다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2일차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1일차

2008년 8월 5일(화) [카미노2일] Rates - Barcelos (16.4km)


아침 6시 반에 눈이 떠졌다. 주변에는 순례자들이 이미 일어나 짐을 챙기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 저녁에 만난 중년 아저씨 순례자 삼인방도 주섬주섬 짐 챙기며 떠날 준비 중이라 나도 재빨리 따라 나섰다. 이들은 작년에 카미노 프리미티보를 걸었다니 이제 카미노를 시작한 내 입장에서 따라가며 배울 것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아침 안개를 헤치며 길을 떠나는 순례자 삼인방
순례길에서의 첫 아침식사

마을(Rates)에 7시에 문을 여는 카페가 있다고 하여 함께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 식단은 우유 넣은 커피에 햄 넣은 빵. 이 나라에서 흔히 먹는 아침식사의 형태라고. 


노련한 이들을 따라 나섰더니 일단 아침식사부터 성공이다. 나 혼자였더라면 아침에 무엇을 어떻게 시켜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고 알더라도 말이 안 통해(소도시 상점에서는 영어가 그다지 원활치 않다) 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continental breakfast'인가!


뱃속을 채우고다시 노란 화살표를 따라 안개가 자욱한 시골길을 걸어갔다. 한시간 정도 갔을까? 뒤에서 젊은 여자 순례자가 나타나 인사를 한다. "부엔 카미노!" 뒤에서 나타나 우릴 따라잡았으니 우리보다 빠르게 걸은 셈이다.


"빨리 걸으시네요?"

"그런가요? 처음 걷는거고 혼자 걷다보니 빠른건지 잘 모르겠어요."


두 번째 아침식사

그렇게 만난 포르투갈인 순례자 마리아나와 함께 일행이 되어 나까지 다섯 명이 같이 걷게 되었다. 마리아나는 사전 정보 없이 출발하여 Rates에서 식사를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다가 만나는 첫 카페에서 마리아나의 아침식사를 위해 다 같이 멈추었다.

 

카미노 길가에 있는 가게라 그런지 안에 순례자의 상징인 지팡이와 조개 껍질로 장식을 해 놓았다. 그리고 순례자들의 '순례자여권'에 도장도 찍어준다. 원래는 순례길을 따라 걷다가 들리는 성당이나 알베르게에서 도장을 받아 카미노 구간을 걸어왔을 증명하는 용도라 알고 있는데, 순례길 위의 카페나 식당, 호텔 등에서도 이처럼 도장을 찍어주는 곳이 많다. 꼭 나중에 증명용으로 필요하다기 보다도 순례길의 기념으로 남기기위한 느낌.

순례자를 환영하는 듯한 실내 장식
산티아고 가는 길 이정표. 포르투갈어라 스페인어와 약간 다르게 생겼다.
목적지 Barcelos 시가지로 들어가는 다리
꽃밭으로 덮인 언덕위에는 멋진 성당이...

오늘 걷는 구간은 16.4km로 짧은 편. 후다닥 걸어서 채 정오도 되기 전에 목적지인 Barcelos에 도착해버렸다. 어제 걸은 구간은 혼자라서 그런지 참 길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너무나 빨리 와버린 느낌이다. 중간에 시골 카페에서 한번 쉰 이후로 내리 세 시간을 걸어 도착했다. 


Barcelos에는 알베르게가 없어 순례자에게 할인을 해주는 호텔에 묵었다. 

(* 2019년 현재는 Barcelos에도 알베르게가 있다고 합니다. 좋아졌네요!)

짐을 풀고 씻은 후 점심 먹기에 앞서 간단히 목을 축인다. 장소는 숙소 바로 앞 노천 카페.  

숙소 앞 노천카페


포르투갈 맥주 Super Bock

Super Bock은 순례길을 걷는 동안 가장 많이 마셨으며 지금도 가장 기억나는 포르투갈 맥주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목을 축인 후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동네 여기저기 어슬렁어슬렁 다니며 구경 반 식당 찾는것 반. 지금도 그렇지만 이 때의 나는 유럽 음식에 대해 아는게 더 없었고 그냥 유럽인 동지들을 따라 다닐 뿐이었다.    

나의 점심식사. Biff de Peru Grelhado.

메뉴판은 당연히(?) 포르투갈어. 포르투갈인 마리아나야 그냥 시키면 되고, 나머지 세 사람도 스페인어를 대략 할 줄 알아서 포르투갈어 메뉴를 보고 주문이 가능하단다. 나만 이방인에 나만 까막눈이야 ㅋ 그렇다고 일일이 메뉴를 설명해 달라고 할 수 없어 메뉴판에서 대충 찍으며 이게 뭐냐 물었더니 칠면조란다. 오케이 난 이걸로! 


유럽인인 이들은 당연하게도 일인당 하나의 메인과 하나의 디저트를 시킨다. 일행과 상의해서 시키고 시킨 음식은 여럿이 나눠 먹는 한국인의 정서와 많이 다르지만 나도 이렇게 각자 시키는게 편하다.

왼쪽은 디저트로 시킨 과일샐러드
이 도시의 전설을 조각한 비석 

식사를 하고 나와서 도시를 둘러봤다. 폐허로 변해버린 어느 옛 성당 앞에는 Barcelos의 전설을 조각한 비석이 있었는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옛날에 산티아고로 가던 한 순례자가 Barcelos에 묵었다가 억울하게도 은 세공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순례자는 판사의 집을 찾아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 증거로 식탁에 올라온통닭이 일어나 울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형이 집행되기 직전 정말 닭이 일어나 꼬끼오를 외치게 되어 모두들 순례자의 결백을 믿게 되고 순례자는 죽음을 면하게 되어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닭 모양 열쇠고리나 인형 등 기념품을 파는 곳이 많았고, 공원에 알록달록 닭모양 장식을 해 놓은 곳도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 포르투갈 길 말고 순례자들이 많이 걷는 프랑스 길(Camino Frances)에도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는 도시가 있다는 것. 검색해보니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라는 곳이다.(헥헥, 길기도 해라 그 이름)


저녁식사를 더욱 즐겁게 해준 와인

각자 쉬다가 저녁식사를 먹으러 다시 만난 일행들. 이 유럽인 일행들은 저녁식사에 비노(와인)를 반주로 곁들인다. 사실 이때만 해도 한국에서 와인은 고급스러운 술이자 뭔가 분위기 잡고 마시는 술로 흔히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나는 그냥 아무 주전자에 받아다가 밥먹으며 음료수 마시듯 편하게 마시는 와인 문화를 여기서 처음 접했고 매우 신선했다. (사실 아무 주전자는 아니겠지, 이 소도시 식당에서 나름 구색 갖춘 주전자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단거다.) 


나중에 박찬일 셰프의 '보통날의 와인'이란 책에서 본고장의 와인은 딱히 격식 차리는 술도 아니고 그냥 한국 사람이 밥 먹을때 떠 먹는 '국물'에 해당하는 것이란 취지의 내용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내가 본 본고장 와인이 딱 이랬어! 유럽에 뚝 떨어진 이방인인 나에게 유럽 문화를 접하게 해주는 든든한 일행과 맛있는 요리와 맛있는 국물이 있으니 저녁식사 시간이 즐겁다.


나의 저녁식사는 돼지고기 요리. Feveras라는 이름.

이 동네에서는 감자를 참 즐겨 먹는 듯 하다. 뭐만 시켰다 하면 감자튀김이 같이 나오네. 불만은 없다 원래 감자튀김 좋아하는 나니까.

디저트 삼아 마신 커피 

저녁 식사 후에는 아저씨들이 희한한 것을 시킨다. 독한 커피에 독한 술을 타서 마신단다! 음...그러니까 커피는 그냥 이 동네에서 흔히 마시는 커피인 에스프레소인데, 술은 소주보다 훨씬 독한 술. 술 이름이 뭐냐 물으니 아구아르디엔떼(aguardiente)라고. 나도 마셔보겠다 같이 시켜달라 했다. 맛은? 


"크......"


열흘간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단 한 사람의 한국인도 보지 못했다. 실은, 한국인은 커녕 아시아인도 보지 못했다. 철저히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만큼 유럽인 일행과 삼시세끼를 함께하며 그들의 유럽식 문화를 생생히 접할 수 있었던 참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 포르투갈 길 소개 및 전체 일정은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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