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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커피 May 30. 2019

1. 차마 떨어지지 않는 첫 걸음을 내딛다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1일차

나의 브런치 개설 이후 구체적인 여행기를 쓰는 것은 이 글이 처음인 것 같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도 있는데 (심지어 호주 여행기 예고편까지 올려놓고) 굳이 11년이나 된 카미노(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를 꺼낸 것은 TV에서 보게 된 스페인 하숙 때문이다. 한동안 기억 속에 묻고 살던 그 길을, 처음 걷기 시작했던 포르투에서부터 다시 되짚어보며, 다시 한번 그때의 가슴 뛰던 느낌을 느껴보고 싶고,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갈매기야 너는 아니, 이 아름다운 도시를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내 마음을

2008년 8월 4일(월) [카미노1일] Porto - Rates (37.5km, 실제 걸은 것은 20km 정도)

그림자는 그럴 듯 해 보이는 순례자여...

전날 오후에 도착한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Porto), 불과 몇 시간 만에 이곳의 매력적인 모습에 푹 빠져버렸다. 카미노고 뭐고 다 그만두고 눌러앉아, 남은 며칠간의 일정을 아름다운 이 바닷가 도시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 길이 어떤 길인데, 내가 어떻게 준비하고 계획한 카미노인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처음 해보는 혼자만의 해외여행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고독을 느끼며 다소 감정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를 강력하게 이끄는 이 도시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흔들리던 마음을 추스른다. 그래도 이 도시에 남는 미련과 타협을 하여, 월요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려던 일정을 바꾸어 오전은 포르투 시내 관광에 조금 더 할애하고 카미노는 오후에 출발하였다.

포르투 대성당(Se) 옆으로 보이는 도우루 강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착실히 도장을 받아나가 최종적으로 나의 순례를 증명해야 하는 종이인 순례자여권(크레덴샬, credencial)은 전날 포르투 대성당(Se)에 들려 만들어 두었고, 기능성 섬유로 된 등산복, 모자, 스틱 등등, 걷기 위한 준비도 다 갖추어져 있다.


순례자여권에 도장을 찍은 대성당에서부터 바로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어도 되지만,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갈 때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해서 중앙분리대를 넘는 악명 높은 난코스가 있다는 정보를 미리 들었기에(2008년의 이야기인데 2019년 현재는 더 나은 길로 바뀌었기를 희망한다), 시내에서 메트로를 타고 30분 정도 떨어진 Vilar Do Pinheiro를 시작점으로 잡았다.

도보 순례길을 본격 시작한, 메트로 Vilar Do Pinheiro역

산티아고 순례길, 특히 포르투갈길에 대해서는 변변한 한국어 가이드북도, 인터넷 자료도 많지 않던 시절이다. 게다가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다! 나는 집에서 구글 지도를 띄워놓고 (2008년에도 구글 지도는 있었음에 정말 감사한다...) 순례길, 즉 카미노에 이르는 가장 편리한 길을 찾아서 종이에 프린트를 해갔다. 바로 아래의 스크린샷을...

구글 지도에서 찾은 Vilar do Pinheiro 지도

역시 인터넷에서 찾아 출력한 포르투갈길 안내 지도와 구글에서 출력한 지도(위)를 들고 이리저리 비교하며 찾아가니 첫 번째 화살표를 만날 수 있었다. 왼쪽에 파란 M 있는 곳이 메트로 역이고 오른쪽으로 한참 와서 R. do Monte를 만나면 진짜 카미노가 시작. 역에서 대략 십여분 거리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이 길이 과연 맞을까 얼마나 불안했던지...

감격의 첫 화살표! @ Ruo do Monte
길이 아닌 곳에는 노란 x 표시를 해놓기도 했다.
드물게 보이는 파란 화살표는 산티아고를 출발해서 거꾸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때로는 파란 화살표를 보고 내 갈길을 찾기도 한다. 방향은 달라도 최소한 내가 "맞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은 알려주니까.

우리나라 꽃 - 무궁화를 카미노에서 만날 줄이야.
돌다리가 있는 작은 마을 풍경

저 돌 다리를 건너 작은 시골 마을을 통과해서 카미노가 이어지겠지...

아쉽게도 폐쇄된 돌다리

아니었다 -_-;

대신 놓인 현대식 다리

안전문제인지 다리는 폐쇄되어 있었고 대신에 좀 더 가서 현대식 다리를 건너야 했다. 차들이 쌩쌩 다니는 현대식 다리는 별 볼일 없었지만....

다리에서 내려다본, 검푸른 빛의 강

그 다리에서 내려다본 검푸른 강물은 정말 멋졌다.

어쩌면 저렇게 까만색일까 싶을 정도로 검다.


처음 시작 부분에서는 쉽게 카미노 찾았다고 좋아했는데, 걷다 보니 화살표가 안 보여 고생한 게 여러 번이다. 내내 혼자 걸었으므로 어느 길이 맞을까 의논할 상대도 없고. Bagunte란 마을에서는 완전히 다른 길로 10분 이상 걸어 들어가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빠져나왔다. 영어를 못하는 동네 아주머니께 Rates 가는 길을 묻는데 "라떼스"라고 물어보니 몇 번 말해도 전혀 못 알아듣는다. (그래도 "레이츠"라고는 안 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포르투갈어로는 "가떼쉬" 비슷하게 발음된다. 첫 자음이 가래 끓는 듯한(...) 그러니까 ㄹ도 ㄱ도 아닌 그런 소리?

노란 화살표 뒤편 마을이 예뻐 보였다

걷다 지쳐 노란 화살표 너머 삐죽 솟은 성당의 종탑을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화 속 마을처럼 보이는 저 마을이 Rates이기를 바랐으나... 아니었다. 마지막 2시간 정도 체력이 달려 좀 힘들었다. 8월 초 한여름이고, 원래 선선한 이른 아침에 시작해서 점심때 무렵 걷기를 끝내는 것이 카미노 순례길의 정석인데, 떨어지지 않는 발길에 오전 시간 포르투를 더 둘러보느라 땡볕이 내리쬐는 오후 동안 걸었으니..... 어쨌든 카미노를 걷는다는 것이 쉽게 자만할 일은 아니었다. Vilar do Pinheiro에서 12시쯤 출발하여 목적지 Rates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였다. 겨우 20km 걷는데 6시간이라니! - 다행히 다음날부터는 이보다 훨씬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목적지를 한 시간쯤 앞두고는 Rio Mau를 지날 때쯤 현지인 아저씨와 마주쳤다. 나보고 "walker?"냐고 묻더니 생수 작은 거 한 병을 주시네. 고맙게 받아서 원샷!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의 자녀들도(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정도로 보임) 카미노를 걷는 중이고, 자녀들을 위해 필요한 음료, 간식, 짐 들을 차로 운반해와 중간중간 길목에서 지원해주는, 인상 좋은 포르투갈인 아버지였다.  

Rates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걷고 걸어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Rates에 도착. (정식 명칭은 San Pedro de Rates)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에 도착할 즈음엔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Vilar Do Pinheiro에서 정오 지나서 출발한 거 생각하면 20km 거리를 여섯 시간 걸려 걸은 셈이다. 중간에 길을 일어 헤매기도 하고 첫날이라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해가 가장 뜨거울 시간에 걸었기 때문에 더 지치고 더 자주 쉬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긴 하루를 혼자 걸었다는 느낌. 카미노를 걷는다는 것, 평소에 걷는 것 좋아한다고 자만할 일이 아니었다.

Rates 마을 입구에서 나를 반겨주던 로마시대 성당

Rates는 도시라기에는 작은, 그냥 마을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한국으로 치면 면 소재지 정도? 그래도 예쁜 집과 건물들도 많고, 로마시대에 세워진 성당도 있다. 로마시대 성당은 여기뿐 아니라 이 지역 웬만한 소도시에는 다 있는 것 같았다.


Rates에는 공식 알베르게가 있다. 포르투갈 길이 카미노의 주류가 아닌 만큼 순례객 수는 물론 알베르게도 많지 않은데, 그나마 Tui 이후 스페인 갈리시아 구간에는 갈리시아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알베르게가 잘 갖추어져 있는 반면, Valenca 이전의 포르투갈 구간에는 알베르게가 띄엄띄엄 있었다. (2008년 당시의 현황이며, 지금은 더 많은 알베르게가 개설되어 운영 중이라 알고 있다.)

Rates 알베르게. 출입문 위 깃발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층침대로 가득 찬 알베르게 내 침실. 오른쪽 1층이 내 자리이다.

마당에는 순례자들이 여기저기서 쉬고 있었다. 걸어오면서는 한 명도 못 본 순례자가 여기 오니 꽤 많네. (지각생이 본 풍경)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고 대체 어디서 순례자 등록을 하고 자리를 배정받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마당에 가서 두리번거리니 웃통 벗고 무성한 가슴털^^ 드러내며 쉬고 있던 중년 아저씨 두 명이 영어로 말을 걸어와 도움을 받았다. 봉사자가 지금 자리에 없으니 그냥 아무 침대나 빈 데다 짐을 풀면 되고, 도장은 슈퍼마켓에 가서 받으면 된단다.


빈자리에 가방을 풀고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빨래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배가 고프다. 부엌이 어떻게 되어있나 두리번 구경을 하는데 다른 젊은 순례자가 말을 건다. 자기들이 파스타를 너무 많이 삶아서 남았는데 혹시 필요하면 가져가란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맙다 하고 슈퍼에 가서 토마토소스를 사러 갔는데, 파스타 면이나 소스가 저렴해서 놀라웠다. (둘 다 1유로 안쪽으로 살 수 있었다.) 더욱이 내 눈을 돌아가게 한 것은 1유로짜리 와인. @.@ 나 여기 그냥 눌러살면서 와인이나 마시며 살면 안 될까?

공짜로 얻은 파스타면에 토마토소스를 사다 데워서 같이 먹었다.
한 조각 얻어먹은 '초리소'. 이 지역에서 많이 먹는 소시지라고 한다.

파스타 소스를 데워서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먹느니 기왕이면 나가서 볕이나 쬐면서 먹으려 나갔더니 아까 나를 도와줬던 중년 남자 순례자들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다.


"제가 껴도 될까요?"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같은 순례자인 나를 반기며 비노(Vino, 와인)도 한 잔 권한다. 오.. 와인에 파스타라, 한국에서라면 왠지 비싼 데서 분위기 잡으며 먹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서는 한국에서 소주에 라면 끓여먹을 돈으로 알베르게 야외테이블에서 먹으니 색다르다. 같이 먹는 순례자 세 사람은 독일인 클라우스, 스페인인 토마스, 스페인에 사는 독일인 귄터이다. 낮에 걸으면서는 아무도 만나지 못해 사람이 그리웠는데, 이렇게 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재충전을 하면 내일부터는 다시 열심히 걸을 수 있겠지?



* 포르투갈 길 소개 및 전체 일정은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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