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3일차
포르투갈길, 카미노 포르투게스의 셋째 날. 처음으로 33.6km라는 긴 거리를 걷기 위해 전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6시 반에 뿌연 안갯속을 걷기 시작했다. 그제 만난 중년 삼인방에 어제 만난 마리아나, 그리고 나까지 총 다섯 명이 같이 움직였다.
카미노를 모두가 같은 일정대로 걸을 필요는 없지만, 알베르게가 띄엄띄엄 있는 포르투갈 길에서는 숙소 때문에라도 다들 얼추 비슷하게 걸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보편적인 일정에 따르면 오늘 걷는 길이 가장 긴 구간이다. 어제 걸은 길의 두 배가 넘는 거리라 긴장이 된다. 물집은 잡히지 않을지, 내 고질병인 무릎 연골 부상이 재발하지는 않을지 신경이 많이 쓰인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 이상 없이 걸어왔다.
걷다가 만난 첫 카페에서 어제와 같이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했다.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는 스페인이지만 지금 나는 포르투갈 땅 위에 있으니, 포르투갈인인 마리아나에게 포르투갈어 단어를 몇 개 물어보았다. 우유 넣은 커피는 카페콩라잇(cafe com leite), 토스트는 토가다(torrada). 스페인어(cafe con leche, toastada)와 다르지만 영 다르지는 않다. 하긴, 스페인어만 아는 중년 삼인방도 대충 포르투갈에서 서바이벌 포르투갈어로 의사소통하는 것 보면. 서울말과 경상도 말보다는 멀고, 한국말과 일본 말보다는 훨씬 가까운 정도로 추정된다.
걷다 보니 전날 걷다 지나쳤던 다른 순례자들을 또 마주치게 된다. 아직 이름도 국적도 모르지만 동료 순례자를 만나면 반갑게 "올라(Ola)"를 외쳐준다 - 다행히 이 인사말은 포르투갈, 스페인 공통이다.
첫날 혼자 걸을 때는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쉬었는데, 이미 두 번째 카미노를 걷는 삼인방은 두세 시간 정도는 쉬지 않고 한 번에 걷는 스타일이다. 나도 별 수 없이 그 패턴을 따라 걷다 보니 다소 힘들긴 해도 일정한 페이스를 지키며 걷는 것 같아 좋다. 보통은 키가 가장 큰 클라우스가 성큼성큼 선두에서 걸으며 길을 찾는다. 가끔 화살표를 잃어 길을 되돌아 가는 경우도 있지만 나 혼자 길을 찾을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놓인다.
나는 오랜만에 와보는, 그리고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유럽의 모든 것이 신기하여 음료고 음식이고 다 찍어대는데, 유럽인 길동무들은 내 모습이 신기한지 깔깔댄다. 몇 번 보더니 내가 카메라를 꺼내면 아예 음료 잔을 내 앞에 몰아주기를 한다 ㅋㅋㅋㅋ 고마워 친구들. 근데 그대들도 만약 어느 날 동아시아에 뚝 떨어져 낯선 음료와 음식을 접하면 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고!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인물 사진을 추가했으나, 초상권 보호를 위해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ㅋ
카미노 포르투게스에는 바닥이 돌로 된 길이 무척 많다. 자갈이 굴러다니는 길이 아니고, 큼직큼직한 돌을 박아놓은 일종의 포장도로라고 하면 되겠다. 흙바닥과 달리 딱딱해서 오래 걷기는 좀 안 좋다. 그 길을 따라 양 옆으로 펼쳐지는 농촌 풍경은 옥수수밭 아니면 포도밭이 대부분이었다. 옥수수밭과 포도밭이 지겨워질 때쯤에는 야트막한 산이 나타나서 잠시 숲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점심도 안 먹고 9시간 가까이 걸어 오후 세시 반에 Ponte de Lima에 도착했다. 긴 거리를 걷느라 힘이 들었지만 강을 끼고 자리 잡은 Ponte de Lima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힘들었던 하루가 충분히 보상되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그 위에 놓인 근사한 중세시대 다리, 그리고 강변의 성당. 오래도록 눈에 담아두고 싶었던 풍경. 흥미로운 것은, 이곳까지 오며 눈대중으로 볼 때 Ponte는 '다리'라는 뜻인데, 도시 이름이 Ponte de Lima라는 것은 그냥 '리마 강의 다리'인 거다. 그만큼 저 중세 다리가 이 도시의 상징인 것이겠지?
Ponte de Lima에는 알베르게가 없지만, 카미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스호스텔이 있어 저렴하게 묵어갈 수 있었다. 일인당 11유로에 시설 깔끔하고 아침식사도 제공되니 알베르게가 없어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 2019년 현재는 이 곳에도 알베르게가 있다.)
지치고 배고팠다. 짐 풀고 나와 피짜리아(피자 가게)에 앉아 마르게리따를 시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그렇지만 전 세계 어디든 이탈리아 음식점이 없는 곳은 없는 듯하다. 사진의 혼자 먹을 수 있는 크기의 피자가 5유로 정도. 물론 맥주도 빠질 수 없다. 지금까지 매일(!) 마시던 Super Bock이 아닌 Sagres가 보인다. 이것 역시 포르투갈 맥주인 듯. 지역마다 다른 맥주를 마셔보는 것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유스호스텔 앞 길(Rua) 이름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길'이다. 혹시 뭔가 사연이 있는 걸까, 교황님이 카미노를 찾아와 이 유스호스텔에 들리기라도 하였을까?
방으로 돌아와 얼마간 낮잠을 즐기고 일어나니 어두운 밤이다. 좀 늦긴 했지만 체력 유지를 위해서는 굶고 잘 수는 없다. 다시 밖에 나가 저녁거리를 찾는다. 일행이 주문한 저녁은 닭고기 크로켓(Croquetes), 바칼라우(Bacalhau) 튀김, 문어(Polvo) 요리. 이렇게 시켜서 다 같이 나누어 먹었다. 이들도 때로는 이렇게 나눠 먹기도 하는구나. 아마 국물이 없어 깔끔하게 가져갈 수 있는 음식이니까 그렇겠지.
매일매일 낯선 음식 속에 살다가 제법 익숙한 크로켓을 보고 반가웠다, 이름도 맛도 고로케였거든. 크로켓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로케가 되어 한국에 들어왔지 싶다. 바칼라우는 이 지방에서 많이 먹는 생선의 이름이고, 문어도 이 지방에서 많이 먹는 요리라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 길의 특징 중 하나는,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을 계속 걷게 되므로 이렇게 해산물 요리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 분명 먹기는 간단하게 먹었는데 식사비는 엄청 나왔다. 해산물 요리가 비싼 음식인가? 와인이 비쌌나? 까막눈인 나는 유럽인 동료들이 알아서 잘 시켰겠지 하고 믿는다!
* 포르투갈 길 소개 및 전체 일정은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