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딸과 단둘의 여행을 돌아보며
원래는 여행을 다녀오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여행기를 작성했었다. 당시 운영하던, 지금은 없애버린 여행기 블로그에 차곡차곡 글을 올렸는데, 지금 연재하는 이 여행기는 당시에 썼던 여행기를 손보아 다시 브런치에 올리는 것이다. 당시에 올렸던, 여행 후 얼마 되지 않아서의 소감을 남긴 글을 먼저 옮겨보겠다.
지금 제 등 뒤로 첫째 딸이 곤히 잠들어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삼십 분 전 딸아이가 아빠 팔 베개를 하고 자고 싶다더군요. 2주간의 태국 여행 중 거의 매일 밤 내어주었던 제 팔을 오랜만에 기꺼이 배게로 내어 주었습니다. 팔을 지그시 누르는, 하지만 무겁다고 할 수는 없는 아이 머리의 느낌이 전해지며, 여행하던 때의 생각도 많이 떠올라 행복했습니다.
아이와 둘이 객지에서 24시간 내내 붙어지내는 생활을 열흘 이상 했습니다. 주변에서 많이 칭찬해 주십니다. 아빠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아이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겠다고. 맞습니다. 아이에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 저의 7,8세 때의 기억은 어렴풋합니다. 제 아이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나는 7,8세 때의 일화 중 하나가 되겠지만, 선명하고 구체적인 기억으로 남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이에게 행복했던 느낌만이라도 남기를 바라는 거죠.
사실 그보다도 더 선명한 여행의 기억은 저 스스로에게 남을 겁니다. 앞으로 이 추억을 더 소중하게 간직할 사람도 딸아이보다는 제가 아닐까 합니다. 세상에서 아내 다음으로 제일 사랑하는 딸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여행지에 데려가, 아이가 즐거워하는 걸 보고 넓은 세상에 눈뜨는 모습을 보며 같이 즐거워했던 저의 행복한 추억. 제가 아이를 위해 여행을 준비했다기보다는 저를 위해 아이가 여행을 같이 가 주었다고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지.
이렇게 우리만의 '일곱 살 여행'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제 밀린 여행기 정리하러 가봐야겠네요. :D
이후로 6년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던 그 딸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어있고, 이때와 같은 아기 같은 모습은 당연히 없어졌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딸이다. 역시 당연하게도 아이는 세월이 흐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점점 잊는다. 여행 다녀온 직후에는 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던 아이는, 이제는 내가 남겨놓은 사진 앨범을 보면서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나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반복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억을 할 뿐, 처음과 같은 선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괜찮다, 6년 전 내가 썼던 말 그대로니까.
앞으로 이 추억을 더 소중하게 간직할 사람도 딸아이보다는 제가 아닐까 합니다.
맞다, 지금에 와서 이것이 더 드러나는 것 같다. 일곱 살 딸의 여행은 사실 딸 본인보다도 나에게 더 구체적이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도 이 여행과, 여행에서 나와 같이 행복해하던 어린 딸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 없이 행복하고 흐뭇한 표정이 지어지는 아빠, 그게 바로 내 모습이다.
딸에게는 나만큼의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딸에게도 사랑하는 아빠와 단둘이 즐겁게 여행했다는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고, 사춘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아빠인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는 둘만의 이 여행의 지분이 꽤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깨닫는다,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니었고, 아빠를 잘 따라준 아이가 좋은 딸이었음을.
"기억도 못할 어린아이와 멀리 여행 갈 필요가 있나요? 나중에 더 커서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이런 질문을 간혹 받기도 했다. 1편의 서두에서 언급한 녹색희망님의 '일곱 살 여행'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만약 기억에 남는 것만 소중하다면, 나중에 기억도 못할 어린 아기를 왜 정성 들여 키울까? 그게 그렇지가 않은 거다. 아이가 여행지에서의 사건 하나하나를 나중에까지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여행지에서의 설렘과 행복함, 그리고 그 순간을 가족과 함께 했다는 것은 아이의 마음속 어디엔가 분명히 남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내 아이와 보낸 소중한 시간과 추억이, 단지 나중에 얼마나 아이에게 기억되느냐로 가치가 매겨지는 게 아니기에.
그리고 아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면 된다. 아이와 맛있는 것 먹고 재미난 것 경험하며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 내가 보고 내가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그 여행을 하며 내가 행복했고 지금까지도 그 추억으로 행복하니까.
이 글을 보며 혹시라도 어린 자녀와의 여행을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다. 지금 떠나세요! 사랑하는 아이의 현재 모습으로 추억을 남길 기회는 바로 지금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