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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 나름 선생님 Oct 26. 2022

정체성-1

‘정체성’이 마을 상공에 문득 등장했을 때, 그것은 역사상 가장 센세이션 한 일이 되었다. 물리법칙들을 거스르는 기적들은 모두 기록만 돼있을 뿐 실제 우리 눈 앞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체성’은 자유자재로 물리법칙들을 거스르는 존재였다. ‘정체성’이란 이름이 붙기 전에 그 천체는 그저 소행성이라 불렸다. ‘정체성’의 등장은 세계를 초긴장 상태에 빠뜨렸다. 혜성과 소행성의 충돌로 지구는 몇 번이나 우주에서 사라질 뻔 했었다. 

‘정체성’의 궤적은 일반적인 지구근접천체와 전혀 달랐다. 1918년 최초로 지구근접 소행성 ‘887 애린다’가 발견된 후 지금까지 약 1천 개의 근접천체가 발견됐지만 그들은 모두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대기권에 접어든 소행성이라면 응당 몇 조각으로 부서지고, 엄청난 속도 때문에 하늘에 불을 붙이고 지구에 울려 퍼지는 굉음을 만드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정체성’은 마치 능숙한 행글라이더 선수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 듯 대기권 안에서 바퀴처럼 굴러다녔다. 그러다 ‘정체성’은 하늘에 뿌리를 내린 듯 한 곳에 정착했는데 그곳이 바로 그레고리가 사는 마을 위였다. 

각국의 정부들은 최고의 과학자들을 모두 불려 들었다. 똑똑한 그들이 모였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가장 무식한 방법은 소행성 근처나 표면에 핵폭탄을 터트리는 것이지만, 그건 지구와 상당한 거리에 있는 소행성에게 쓰기도 위험한 방법이었다. 아니면 소행성 표면에 폭발을 일으켜 가스와 먼지를 분출시켜 궤도를 바꾸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폭발 시 방사능 물질을 지구가 뒤집어쓸 위험도 있었다. 그 밖에도 궤도 효성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논의됐지만 실제 결론은 10분만에 났다. ‘정체성’의 위험을 줄일 다른 방법은 없고, 그저 지하 깊숙이 대피소들이나 많이 만들어놓는 게 최선이라고.

헌데 예상과 달리 ‘정체성’은 ‘효성’ 마을 위에서 마치 좌선 중인 스님처럼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사일들은 늘 ‘정체성’을 조준하고 있었고, 그레고리 마을 사람들은 언제든 대피할 수 있게 늘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정확히는 11년 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재앙이 일어나도 나는 괜찮을 거란 ‘불사조 콤플렉스’에 빠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후 ‘정체성’은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달을 노래하던 시인들과 가수들은 이제 ‘정체성’을 노래했고, 철학적 불가지론과 종말론적 종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체성’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호기심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냥 천문학도 아니고 물리천문학, 그냥 전자기학도 아니고 무려 양자전자기학, 그냥 비선형 수학도 아니고 화학적 비선형 수학으로도, 그냥 문학도 아닌 초초낭만주의 문학과 그냥 철학도 아닌 절대완전관념론 관련 종사자들이 매일 ‘정체성’ 연구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정체성’에 대해 새로 알아낸 바는 없었다.

각국 정부에서도 ‘정체성’에 대해 알기 위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체성’이 지구에 온 지 한 달 뒤에 ‘정체성’ 착륙 시도를 했었다. 튼튼한 체격의 천체물리학자 한 명과 전설적인 특수 유격대원 한 명, 그리고 우주비행 경험이 있는 우주인 한 명과 특수 제작된 전투기 조종사 한 명, 정부에서는 이렇게 네 명을 선발했다. 그들은 무려 세 달 간의 훈련을 받고 ‘뉴 디스커버리 호’란 이름의 특수 비행선을 타고 ‘정체성’으로 출발했다. ‘뉴 디스커버리 호’는 전투기 스무 대의 호위를 받고 날아갔고, ‘정체성’에서 도착하면 달에서 그러했듯 탐사선을 내려 ‘정체성’을 탐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체성’에 거의 다다랐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체성’은 마치 사람이 날아오는 공을 피하듯 ‘뉴 디스커버리 호’를 훌쩍 피해버렸던 것이다. ‘뉴 디스커버리 호’의 조종사도 처음에 너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몇 번 쫓아봤지만 그때마다 ‘정체성’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해버렸고, 사고의 위험 때문에 ‘뉴 디스커버리 호’는 지구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정체성’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가장 유력했던 설은 ‘정체성’이 미국 정부의 비밀무기이고 그간의 제스처는 세계를 속이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 등 전문가 그룹에서는 그런 의견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했다. 인간이 만든 물체가 연료 공급 없이 상공에 1년 이상 떠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물론 전문가 그룹도 ‘정체성’의 움직임에 대해 어떤 이론도 제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중력으로 움직이는 소행성’이란 것 자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1년 동안 ‘정체성’에 대해 유일하게 확실해진 게 있다면 그 별명이 ‘정체성’으로 굳어진 것뿐이었다. 일부 종교 집단에선 ‘정체성’을 ‘메시아’로 부르기를 원했고, 다른 종교 집단에선 ‘마호메트’라 부르기를 희망했고, 종교적 희열과 열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정체성’을 보는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정체성’을 보라는 의미에서, 공식적인 별명을 ‘정체성’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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