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재밌게 내일은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그렇게 살자.
당신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자주 떠올리는가?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이 깊어진다.'
정말 이 문장대로 라면 나는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사색하고 빠져보기로 했다. 죽음의 바다에서 다시금 내 삶을, 내 삶의 의미를 건져 올려 보고 싶다.
<메멘토 모리, 죽음에 관하여>
무려 1년 만에 다시 적는 메멘토모리 시리즈.
작년 5월부터 9월쯤까지 '죽음'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강렬하게 빠져있다가, 그 이후로는 조금은 성기지만 꾸준히 '죽음'에 대해 떠올렸다. 매일 현생이 조금씩 바빠질 때마다 '죽음'과 멀어지는 나를 자각하며 애써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글을 적겠노라 자리에도 앉아봤지만 이전만큼 강하게 인지되진 않더라.
그러다 최근, 나의 가치관, 나의 사명, 나의 고정관념에 대해 좋은 질문, 챌린지 그리고 오해를 받았다.
내 근원과도 같게 느끼던 내 사명과 나라는 사람에 대에 벼락같은 질문이 내리 꽂혔다.
나의 근간과 나의 가치관을 뒤흔들만한, 그런 질문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으나 결국은 같은 의미를 향하고 있더라.
우리가 아니라 제 문제를 푸는 게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져요. 저 혼자만 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요."
"왜 자꾸 나보다 남을 우선시해요? 비행기에서 아이, 노약자와 타고 있는 상황에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부터 산소마스크를 끼라고 하나요? 바로 본인이에요. 이 상황에서 아이에게 산소마스크를 끼우는 건 그냥 둘 다 죽자는 커밋먼트예요. 지유님은 본인의 호흡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고 있나요?"
이 문장들은 리더가 되고 싶은 나, 코치로서의 나, 한지유라는 자아에 대해 벼락처럼 내리 꽂혔다.
나는 왜 자꾸 나보다 남을 돌보려 하는가.
그것이 나의 본능적인 기쁨이기 때문인가. 나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함인가.
좋은 리더가 되고 싶어요. 어떤 서비스를 만들고 싶을 때, 만들 수 있는 역량과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좋은 리더가 되어야만 해요. 그래서 힘들어도 버텨요.
"사명, 목표, 역할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정해갈 때마다 틀에 갇히기도 해요. 그래서 뭘 원하는데요?"
“‘나는 운동선수다, 나는 음악가다, 나는 (어떤) 수행자다.’ 이런 말은 ‘내가 누구인지’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하나로 압축해 버립니다. (…) 즉,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보다 얼마나 잘되는가’가 곧 나의 정체성이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집착적 사회가 만드는 함정입니다.” _마이클 거베이스, 2024년 CURIOUS MINDS AT WORK 팟캐스트에서
2024년 마무리하며 이 글에서 나는 이런 사명을 적은 적 있다.
나는 인류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삶의 목적을 찾고 더 충만한 삶을 사는데 기여한다.
"만약 모두가 목적을 찾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목적을 찾는 게 그 사람들의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면? 삶의 목적을 찾는 건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 것이라는 가설을 기반으로 하는 데 그럼 그 가설은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문제를 풀고 싶어요.
"과연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모두가 행복할까요? 모두가 같은 포인트에서 행복을 느끼나요? 어떻게 확신하죠? 누군가는 일이 적어져서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는 돈을 많이 벌면 행복을 느끼고,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가 있는데? 그건 오지랖이죠. 포용성이 필요해요."
싫어하는 것도 하는 게 인생 아닌가요? 고통스럽고 싫어도 결국 저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뜻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인생은 엄청 큰 고통과 시련도 주잖아요.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삶 아닌가요?
"싫어하는걸 최대한 덜 하는 게 행복 아닌가? 싫어하는 것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 못 피하는 고통과 시련은 어차피 온다. 예를 들면 가족의 죽음 같은"
고통 없이 성장해 본 경험이 없어요. 매번 저는 울면서 커왔는데요. 울다 한계를 넘고, 울다 한계를 넘고 반복해 왔어요. 그렇게 지금의 제가 됐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얘기하는 애들은 공부가 고통이 아니라 재미인 거고 그래서 성장하는 거예요. 울지 말고 한계를 넘어요. 못하면 다른 거 하고요. 그리고 안되는지 되는지 잘 보시고요."
"순간의 고통은 있어도 과정은 재미나야죠. 재미가 더 큰지 고통이 더 큰지 알겠죠. 잘하면 재밌어요. 고통이 크면 재미없어요"
"안되면 되는 거 해라!"
고통이 커야 기쁨도 크고 성장한다는 게 편견이라면?
인생에서 처음 생각해 보는 벼락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매일 성장해야만 한다, 고통이 있어야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어떠한 신념이자 고정관념이었던 거다. 매일 행복하거나, 매일 재밌거나, 매일 충만할 순 없고 인생은 언제나 업다운이 있다. 맞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들도 원할 거다라는 것도 나의 짧은 생각이었다. 내가 다른 인간이고, 당신이 다른 인간이듯,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이 있는데 내가 언제나 나만 생각했구나.
2주간 나의 편협한 생각과 고정관념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을 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권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도 이 정도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니.
결국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였다.
걍 재밌게 살아라! 안되면 되는 거 해라!
그니까 오늘 하루 재밌게 내일은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그렇게 살자.
인간의 뜻과 목적이 거기 있다면 어떻게 굴러가도 거기 갈 거고, 거기 없다면 어떻게 굴러가도 거기 못 간다. 그니까 오늘 하루 재밌게 내일은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그렇게 살자.
여기까지 적고 보니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토를 맥북 비밀번호로 설정하는 요상한 습관이 있는데,
스무 살 내 맥북 비밀번호는 '막살자!****' 였다.
막살자는 게 술퍼먹고 인생을 정말 막살자는 의미는 아니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자는 의미였다.
인생은 짧고 한번뿐이니까. 한 번뿐인 인생, 뭐든지 해보고 즐기고 느끼자고.
짧은 시간 동안 멋지고 가치 있게 살고, 죽을 때 내 인생이 가치 있었다고, 행복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죽자는 의미의 막살자! 였다.
스무 살, 스물다섯 살, 서른 살.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 때마다, 무언가 이루고 싶어 질 때마다, 나를 절제하고 다듬고 견디고 버티는데 참 익숙해진 것 같다. 그래서 다시금 내 삶의 모토의 기어를 조정해보려 한다.
한지유, 막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