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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Feb 22. 2024

자꾸만 뜨고 싶어서

유용하거나 아름답거나



엄마를 닮았나




떠올려보면 내가 어렸을 적부터 엄마는 늘 뭔가를 뜨고 있었다. 기다란 실이 둥글게 감긴 실뭉치와 엄지와 검지로 야무지게 잡은 코바늘, 소파에 앉아 몸을 웅크린 채로 집중하는 엄마와 실이 주는 온기가 집안을 안온하게 감쌌다. 남매의 스웨터로 시작해서 거실의 커튼과 장식장의 덮개, 하물며 차 의자 덮개마저도. 실로 뜬 것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익숙한 유년시절이었다. 오빠와 나는 우스갯소리로 거실의 화분 이파리 덮개 하나하나도 뜰 판이라며 농을 던지곤 했다. 그 말에 슬그머니 웃으면서도 손에서 코바늘을 놓지 않았던 엄마. 나이를 먹으니 눈이 침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를 억지로 말리고 나서야 코바늘이 담긴 주머니는 장롱 깊숙한 곳에 들어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엄마가 뜨개질을 멈추고 나니 바톤을 넘겨받듯 자연스레 내가 뜨개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흐린 눈을 잘하지요





뜨개질을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뭘 하든 간에 아예 못하는 건 아닌데 뭔가 늘 하나가 부족하다. 나사 하나가 빠진 듯 모자라게 만드는 것이 특기였던 나는 기본적으로 꼼꼼함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다. 타고나길 성격이 급하고 끈기가 부족하다. 중학교 가정시간에 (지금도 가정시간이 있나?) 벙어리장갑을 뜨는 숙제가 있었는데, 손등 부분을 무려 꽈배기 모양으로 엮어내야 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걸 머릿속에 욱여넣긴 했으나 어쩌다 보니 꽈배기가 아니라 용이 하늘을 승천하듯 한 방향의 물결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그 상황을 뒤늦게 본 엄마는 풀라고 난리였으나 다시 뜨기엔 너무 아깝기도 하고 흐린 눈으로 바라보면 나름 볼만하다며 그대로 마무리해서 가지고 갔던 기억이 난다.


입시 미술을 할 때도 나는 한결같았다. 그림을 그리다가 뭔가 잘못된 것 같으면 그걸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한 걸음 뒤에 서서 그림을 바라보며 흐린 눈으로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그림이 괜찮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타협이 가능해지면 다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연필을 들었다.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왜 그랬나 몰라. 그러고 보면 참 나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나에게 관대한 만큼 타인에게도 관대하면 얼마나 좋아. 오래 함께 하고 싶은 친구가 자신은 스스로를 대하는 기준과 타인에게 내미는 잣대가 다른 사람을 경멸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그래놓고 나에게 실망할까 들키지 않으려 나도 그렇다며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이 주는 포근함





요즘은 실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집에서 완성하기 좋은 세상이다. 유튜브 영상으로 뜨개방에 가서 배우는 것보다 더 손쉽게 이것저것 배울 수 있다. 코로나가 준 유일한 고마운 점이랄지. 내 작업방에는 빨래바구니 크기의 바스켓 세 개에 털실이 가득하다. 코일링이라고 해서 지끈에 실을 감아 티코스터나 바구니를 만들기도 하고 코바늘로는 가방이나 모자를 만든다. 위빙이라고 해서 나무틀에 실을 겹겹이 쌓아 올려 타피스트리를 만들어 벽을 꾸미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아이패드로 보는 한국 드라마와 함께라면 거뜬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실이 주는 따뜻한 느낌을 사랑한다. 보송한 털실은 보송한 대로 겨울의 맛을 살리고 매끈한 실은 그것대로 여름의 선명도를 높여준다. 선택지가 많은 물감 팔레트와는 달리 고를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다. 그 점이 내겐 한계보다 안도로 다가온다. 심혈을 기울여 조합한 색이 내 손과 바늘에 의해 엮인다. 실의 조합과 형태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바라보는 재미는 실을 뜨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다.



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둥글게 감겼던 실이 한 올 한 올 바늘 끝에서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는다. 내 손 안에서 유용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답이 안 나오는 내 안의 실뭉치를 생각한다. 이것도 끈기 있게 풀다 보면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무용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엇을 만들어내든 살갑게 바라봐줘야지. 뭐든 해내느라, 살아내느라 고단 했을 테니까. 알록달록 고운 실을 바라보듯 애정을 품고 지켜봐 줘야지 내 마음. 좀 그럴 때가 많아도 평생 이고 지고 함께 할 세상에 하나뿐인 내 실뭉치니까.







글/그림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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