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시대적 요소를 담은 아름답고도 힙한 미술관
*9화를 시작하며
어느덧 아홉 번째 연재글에 이르렀다. 처음 연재를 마음먹은 건 늘 지난 여행들의 기록에서 꾸준한 글이 부족하다고 느껴서였다. 사진과 영상으로 멋진 장면과 상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명확한 의도를 담은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내 관점을 담는 것.
연재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저 시간순 나열이 되는 기록도 있었다. 그래서 잠시 멈추어 한 발 뒤처져있는 초심을 다시 다잡아보려 한다. 생각보다 연재가 늘어날 듯 하지만 좀 더 생각을 담은 글을 쓰기로.
(약 6개월 전 여행이지만 매일 써두었던 일기를 보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사진과 영상을 보며 그때 느꼈던 감정에 살을 붙이고 있다)
해외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박물관과 미술관. 그런데 그나마 생생한 기억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지금까지 어림잡아 약 13년 동안 세계 역사와 미술을 책으로, 미디어로 공부해도 정작 그 본고지에서 반짝이는 감동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조각조각 얻은 지식이라 그런지 여행 전 바짝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을 담은 공간을 가는 길, 입을 반쯤 벌리고 두리번거리는 것, 벤치나 계단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최대한 공간을 느끼는 그 시간은 모두 솜털이 까딱일 정도로 좋았다. 물론 그 위대한 소프트웨어를 담고 있는 건축 또한 역사에 남을 아름다움 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것도 인정. 하지만 이번 코펜하겐 여행 중 깨달은 나의 '솜털 까딱이는'이유는 그 공간에 담긴 시간과 사람들이 좋아서 이었다. 왜 이번 여행에서 깨닫게 된 걸까? 생각해 보니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 동서남북 바쁘게 쏘다니던 내가 가장 오래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던 곳, 알고 갔지만 그래도 감동적이었던 나의 코펜하겐 5일 차 여행의 첫 코스 글립토테크 미술관의 기록을 시작한다.
9월 5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1층 카페에서 조식을 먹기로 했고, 조금 더 신경 쓴 옷차림에 나름 오픈런이 필요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 여기 꼭 가야겠어!' 하며 담아둔 코펜하겐 글립토테크 미술관(조각미술관)을 간다. 칼스버그 가문의 개인 컬렉션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고, 조각이 포인트인 곳. 그리고 미술관 중정이 전시품만큼 유명한데 야외 정원처럼 무성한 식물과 자연광이 가득하면서 실내의 아늑함까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사진 한 두 장 만으로도 강렬했던 그 아우라를 직접 느끼러 간다니 눈이 일찍 떠질 수밖에!
지난 저녁 호텔 카운터에서 받은 얼음통을 가지고 내려와 반납하고 카페에 앉았다. 따뜻한 라테와 크로와상을 아침으로 주문하고 일기 쓰며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는 시간. 코코호텔에서 처음 아침을 먹는데 왜 카페에서 작업이 잘된다는 후기가 많았는지 알 것 같았다. 속으로 한 백번은 외쳤던 나 여기서 한 2주만 살고 싶다.. 그리고 나머지 2주는 또 다른 호텔에서.
커다란 크로와상을 좌악 찢어 한 입 가득 먹고 고소한 라테를 마셨다. 촉촉하고 고소한 풍미가 입 안 가득해 행복함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손바닥보다 큰 크로와상을 순식간에 다 먹고는 커피는 천천히 마시며 일기 같은 편지를 썼다.
속까지 따뜻,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시원한 아침공기를 더 맘껏 마실 준비가 되었다. 기분 좋게 호텔을 나서니 내 하루에 조명을 켜듯 환한 햇살이 온몸으로 쏟아졌다. 코펜하겐에서 아침부터 해가 쨍쨍한 날 이라니! 미술관의 중정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되었다. 코코호텔에서 티볼리 쪽으로 쭉 걸어다가 보면 티볼리가 끝날 때 즈음 맞은편에 글립토테크 미술관이 있다. 오늘은 늘 지나가던 티볼리 정문 쪽이 아닌 뒤편으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나름 티볼리 울타리 4면을 모두 돌아본 것.
Dantes Plads 7, 1556 København, Denmark
미술관 오픈 30분 전. 앞에는 이미 더 일찍 온 사람 두세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다들 대놓고 줄을 서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오픈런하는 사람들. 10분 전쯤 되어 자연스럽게 문 앞에 섰더니 다들 일사불란하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화요일은 18-27세 청년은 무료입장을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왔다. 옆구리에 스케치북 한 권씩 끼고.
입장은 정각에 바로 시작했고, 티켓팅을 해야 했던 나는 지하로 내려가 티켓을 결제하고 입장했다. 빨리 들어가고 싶었던 건 아무도 없는 중정 '윈터가든(Winter Garden)'을 너무 싶었기 때문.
이미 티켓팅 없이 일찍 들어온 아이들과 먼저 들어온 여행객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더 이국적인 풍경이라 좋았다. 높은 천장과 그 투명한 창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바깥 날씨, 초록 풀과 사이 틈틈이 보이는 조각상, 정원 관리인이 시원하게 뿌리는 물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한 번씩 빛에 반짝이는 윤슬. 내가 본 윈터가든의 첫 장면이었다. 윈터가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야자수였는데 덴마크에서 처음 보는 거라 신기했다. 알고 보니 설립자의 어머니 소유 정원에서 가져온 것으로 미술관 전체 컬렉션의 많은 작품이 탄생했던 지중해 기후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정원 곳곳에 흩어진 아이들은 각자 스케치하고 싶은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한 바퀴 돌고 나오면 어느 정도 채워져 있을 스케치북을 구경해야지! 혼자 기대감을 안고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연결되는 전시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황홀한 시간. 벽과 천장의 조각과 색, 바닥의 타일, 심지어 그림자까지 세밀한 장식으로 우아함이 넘쳤다. 꽤 많은 색이 쓰였는데 유치하거나 정신없는 느낌 전혀 없이 이렇게 웅장하면서 우아할 수 있다니.. 그 속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맘껏 바라보고 스케치하는 아이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코펜하겐에 사는 학생이었다면 매주 화요일에 놓치지 않고 여기를 왔을 거라며 상상도 해봤다.
미술관은 루프탑이 연결되는 신관(Larsen Building)이 이어져있었다. 구관과 신관, 전체를 사진으로 감상해 보시라.
작품 설명과 벽 컬러를 맞춰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앉은 방향대로 다른 벽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의자. 처음 보는 미술관 벤치였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라 나도 한번 앉아보았다.
조각상을 이렇게 힙하게 전시할 수 있을까? 하얀 조각상을 더 돋보이게 하는 원색적인 벽 컬러와 그와 또 대비되는 POP 컬러까지. 쨍한 경쾌함에 고리타분함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쿨한 감성이 느껴졌다.
마치 채스판에 들어온 듯한 느낌, 연극 무대에 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둥사이에 놓인 조각상들이 모두 중앙을 바라보고 있어 더 장엄한 공간감을 만들었고, 중앙에 서 있으면 나보다 몇 배나 오래된 조각상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묘한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관 만의 개성 있는 컬러, 자재. 과감한 컬러 배합에 벽과 기둥을 만져보며 감탄했다.
호크니 그림이 생각났던 벽 컬러. 길게 이어지는 방마다 벽 컬러가 달라 넘어갈 때마다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무드를 바꿔주었다. 지루할 틈이 없는 공간 흐름.
건너편 창으로 보이는 벽 컬러가 또 다른 작품처럼 보이는 것이 장관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바라본 윈터가든의 모습.
다시 봐도 너무 아름다운 미술관. 뮤지엄샵이 마치 큰 책장 혹은 보물상자처럼 보인다.
신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통로부터 또 따른 느낌. 곳곳에 작품이 있고, 미디어실, 특별전시를 하는 전시장 등이 있었다. 그리고 루프탑까지는 긴 경사와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고, 입구에는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꽤 오래 올라가는 동안 점점 채광이 강하게 들어오고 루프탑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큰 온실 같은 공간에서 유유히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던 건 경사 끝에 돌아서면 이어지는 다음 층마다 조금씩 바뀌는 채광과 벽, 전시된 작품들이 다채로움을 만들어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루프탑에 올라가니 코펜하겐의 색이 아주 잘 보였다. 도시의 건물 지붕을 볼 수 있다니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위에서 보니 더 잘 보이는 코펜하겐의 건물 조화. 오래된 건물들이 중심을 잡고 사이사이로 현대적 건물이 들어서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윈터가든의 돔 지붕이 특히 잘 보였는데 원래는 이 천장을 돌로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돔 천장이 지어지던 시기에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철, 유리 제조 공장이 성행하면서 대중적인 소재가 되어 지금의 채광을 맘껏 들이는 상징적인 구조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우연의 결과였을지 모르나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 미술관에도 어마어마한 아름다운 영향을 주고 있다.
뜨거운 대낮의 햇살에 땀이 나기 시작해서 더 오래 있기는 힘들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 미술관 내 카페가 있어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지금 막 떠오르는 생각을 적기로 했다.
카페는 뮤지엄샵과 이어져있었고, 뮤지엄샵에서 엽서 한 장을 사서 카페테라스에 앉았다. 실내인데도 정원과 가까워서인지 야외에 앉은 느낌이 들었다. 샵에서 산 엽서는 과거 글립토테크의 모습으로 윈터가든에서 학회를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지금은 이곳에서 여름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는데 다음에 꼭 맞춰 와보고 싶었다. 그 다짐의 의미로 고른 엽서 이기도 했다.
레몬머랭 타르트와 샴페인을 시켜 앉았다.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니 몇몇 아이들이 열심히 스케치하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곳에서 직접 보고 그리며 대화하는 사람들. 이들을 보니 우리는 과연 한국의 건물과 조각, 미술을 얼마나 관찰하고 그리며 공부했는지 괜히 비교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아그리파 데생을 해 본 적은 있어도 해태상, 이순신상을 그려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했다.
엽서 속 모습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정원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100년도 더 전에 내가 지금 있는 이 공간에 머물렀던 사람들. 건물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자니 그들의 말과 손짓, 걸어 다니며 펄럭이던 옷자락 소리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역사가 살아있는 듯 한 그런 느낌. 엽서 속 정원의 식물은 지금처럼 키가 크고 무성하지 않지만 지금은 작은 숲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시간의 겹을 느끼다 보니 비워진 샴페인잔. 이제는 그 켜켜이 쌓인 시간 위로 새롭게 쌓아가고 있는 요즘의 것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전에 스뫼레브레드(smørrebrød)를 가볍게 먹고 호텔에 들러 조금 더 가볍게 입고 나가기로!
오전과 또 다른 코펜하겐의 모습으로는 빈티지, 디자인숍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코펜하겐의 멋진 그들만의 긱시크 패션과 사랑스러운 리빙 아이템,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아이스크림가게까지. 캐주얼하고 친절하면서 달콤한 오후 여행의 후기를 다음화에서 소개하려 한다. 사진 프리뷰는 이제 기본옵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