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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트 Apr 22. 2024

오후 4시가 기다려지는 도시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의 도시, 코펜하겐

코펜하겐 하늘 가운데로 높이 해가 떴다. 작은 구름 몇 조각뿐인 맑은 하늘에 햇살이 내리쬐어 '코펜하겐 여름' 날씨가 완연한 오후. 좀 더 가벼운 옷과 신발로 갈아입고 호텔을 나섰다. 

코펜하겐만의 '긱시크'를 찾아 일명 힙한 동네를 가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스웨덴 브랜드 아크네(ACNE)의 제품을 할인금액에 살 수 있는 'Acne Archive'와 궁금했던 식당 Pompette, Poulette으로 두고 주변을 걸어 다니며 구경하고, 중간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들러볼 예정.

하루에 2만 보는 기본으로 걸었더니 허리 사이즈가 줄었다. 지구 반대편에 와서 체감하는 유산소 운동의 효과.. 

오전에 다녀온 글립토테크 미술관으로 가는 방향과 반대로 가는 루트. 거리 분위기부터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더 많고, 학생들도 자주 보였다. 개성 넘치는 건물과 발코니를 보니 코펜하겐의 차분한 톤 속 형형색색을 띄는 재미있는 동네 같았다. 

 조용한 주택가는 집집마다 각기 다른 발코니 장식과 꽃, 나무가 아름다웠고, 테라스에서 오늘의 햇살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여유가 넘쳤다. 상점이 즐비한 도로가로 나오면 빈티지한 컬러와 간판의 다양한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빈티지 가구, 소품, 옷을 판매하는 가게가 유독 많았는데 로컬 손님들도 많이 찾는 듯했다. 가격도 꽤 저렴했고, 브랜드별로 모아두는 가게, 컬러별로 진열하는 가게 등 비슷해 보이지만 또 각자의 방식이 있었다. 



아크네 아카이브를 가기 전 들러볼 아이스크림가게는 Østerberg Ice Cream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 코펜하겐에는 유제품의 나라답게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곳이 많았다. 그중 이곳을 오게 된 건 그들의 아이스크림에 대한 철학이 재미있었기 때문. 


Østerberg Ice Cream

Rosenvængets Allé 7C, 2100 København Ø, Denmark

web  IG

딱 정겹게 느껴질 만큼만 좁은 골목에 있는 Østerberg Ice Cream. 오후 3시쯤이라 그런지 아이들도 많이 왔다. 이들의 아이스크림이 유독 끌렸던 이유는 다양한 과일을 활용한 메뉴가 있었고, 디저트 씬에서는 (내 지기준) 처음 들어보는 'Science'를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Østerberg는 창립자의 이름 Cathrine Østerberg에서 따 온 이름이었는데, 가족이 글로벌 과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품질 좋은 과일을 수급해 현지에서 과일을 가장 신선할 때 손질하여 가공 후 덴마크로 가져오거나 과일의 특성을 파악해 아이스크림으로 최상의 맛을 내는 연구를 많이 한다고 한다. 가게 내부에서 눈에 띄었던 'ice cream science'. 어쩌다 이런 접근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창립자의 석사 논문에서 시작되어 아이스크림의 과학적 구조를 연구하고 지금의 레시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신선했고, 빨리 맛보고 싶었다. 

나의 두 가지 선택은 리치&딸기 맛으로 와플 콘. 어딜 가든 아이스크림에서 베리류는 꼭 먹어본다. 홈메이드 와플 콘 이라니 무미건조한 컵 보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두 스쿱 올라간 아이스크림은 46 크로네, 약 9천 원 정도. 양과 맛, 물가에 비하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넘치는 한 스쿱에 얼른 한 입 먹었더니 느껴지는 신선함! 우유 혹은 크림에 과일 맛을 입힌 게 아닌, 조금만 먹어봐도 과일 함량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삭한 와플 콘 끝까지 야무지게 먹었던 시간이 지금도 기분 좋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창밖을 멍하니 보는데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듯 한 사람, 아이와 손잡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4시를 향해 가는 시각. 코펜하겐 사람들이 퇴근 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다. 코펜하겐에 머물면서 하루 중 가장 '여물었다'라고 느껴질 때면 늘 오후 3-4시쯤이었는데, 아마도 도시 전체가 가족들과 모여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는 때여서 그랬나 보다. 사람들의 생활에 눈을 돌려보니 여행이 아닌 그저 나도 이 도시에 머물며 하루를 보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시와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랄까?

그들의 오후시간에 더 눈이 갔던 건 어둑한 저녁이 아닌 아직은 해가 밝은 늦은 오후부터 가족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거리를 산책하는 따뜻한 여유 때문이었다. 한국의 퇴근 후 시간과 많이 다른 모습에 '행복한 삶'의 모습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약간의 씁쓸함을 뒤로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근처 가게들을 둘러보며 다시 열심히 걸어갔다. 각 도시별 특색을 담아 소개하는 이솝의 쇼룸과 여행 중 가장 눈길이 가는 플라워샵, 다양한 연령대가 방문하던 리빙 편집숍 등 몇 걸음 안에 다양한 가게가 많았다. 특히 근처 리빙 편집숍들 한 편에는 빈티지 제품도 판매 중이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지나 골목 코너를 돌면 또 다른 느낌이 펼쳐지기를 몇 번 반복하니 점점 아크네 아카이브 근처까지 왔다. 빈티지 레코드, 책, 패션, 스트릿 패션 브랜드 숍들이 많은 동네답게 약간은 러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Acne Archive

(지금은 폐업상태)


지도정보를 찾다 보니 폐업한 상태였다. 70%까지 할인할 정도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가격으로 아크네 제품을 살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쉬운 소식. 할인된 가격도 물론 저렴하지는 않지만 제품 종류와 디자인에 비하면 보물찾기 성공률이 꽤 높은 곳이었다. 

아쉬운 소식에 개별로 크게 올려보는 사진. 삐걱 거리는 나무 바닥을 밝으며 이것저것 훑어보았다. 컬러별로 나누어 진열되어 있었고, 액세서리&신발은 안쪽으로 이어지는 방에 가득했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신발장이 천장까지 이어졌다. 꼼꼼하게 한 바퀴 돌고서 매장을 나왔다. 오는 길에 눈에 담아두었던 주변 쇼룸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는 'grocery'라는 편집숍이 있었는데 매장 입구부터 셀렉 제품, 매장 인테리어까지 너무 예뻤고, 남성복 위주였지만 나도 탐나는 제품들이 많았다. Our legacy 제품이 다양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그중 나는 그때 왜 사지 않았나.. 후회하고 있는 Another Aspect 콜라보 티셔츠. 

여유로운 오후에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취해 그것 만으로도 행복했던 때라 물욕보다는 감상이 먼저였나 보다. 일정에 여유가 조금 더 있었다면 이 동네를 한번 더 오고 싶었다. 오후 4-5시면 문을 닫는 가게들이 많아서 빈티지 소품과 책을 둘러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Pompette

Møllegade 3, 2200 København, Denmark

web

Poulette

Møllegade 1, 2200 København, Denmark

IG

5분 정도 걸어오니 다음 목적지 등장. Pompette와 Poulette는 이웃 가게로 Pompette는 와인애호가 Martin Ho가 코펜하겐의 비싼 와인 가격에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다양한 와인을 소개하며 훌륭한 음식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운영하는 Poulette는 프라이드치킨과 버거를 판매하고 있었다. 저녁시간이라 테이크아웃 손님도 많고, 맛있는 냄새가 거리에 가득했다. 프라이드치킨을 포장해가려 했지만 아쉽게도 재료 소진.. 코펜하겐을 또 갈 이유를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갈 때는 다른 길로 가보고 싶어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한적한 주거 지역을 지나다 보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작은 아파트 테라스에서 저녁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소리, 아이들과 장바구니를 나눠 들고 걸어가는 가족들 사이를 걸어가게 되었는데 자연의 소리 이후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주거지역을 둘러싼 작은 화단을 지나니 틈새로 보이는 파란 호수. 

백조와 오리가 떠다니고,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책로 주변으로 찰랑이는 물소리, 달리는 사람들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강아지 산책시키는 사람들의 연령, 아이와 함께 걷는 사람들의 성별은 다양했다. 내가 알고 있던, 봐 왔던 일상과 다른 모습에 마음의 균형이 잡히는 것 같았다. 

숲 길 같은 산책로를 지나 호수가 끝날 즈음 건너편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 근처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는 듯했다. 건물이 예사롭지 않아 찾아보니 Planetarium 천문대. 후기를 보니 한국에 있는 천문대가 더 좋다는 말들이 많았다. 건물 앞 계단에 앉아 호수의 잔잔함과 분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곳. 


호텔이 가까워질수록 큰 도로가 많았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도로를 가득 채웠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전거에 유모차를 연결하거나 강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 코펜하겐의 한줄평을 장면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자전거로 가득한 횡단보도를 건너 Delphin 레스토랑을 지나 호텔로 도착했다. 오늘의 일정을 끝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 야경을 보러 가기 전 호텔 로비에 앉아 사람들의 여유로움을 잠시 구경했다. 


[가만히 앉아 사람구경하며 했던 생각]

퇴근 후 시간은 어느 나라건, 누구에게나 행복하다. 나도 평소에 퇴근 후 시간을 집에서 요리하고, 남편과 강아지와 편안하게 보내며 행복하게 보내지만 여행 전 한창 나는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 매일 알 수 없는 꿈을 꾸고, 온몸이 저려 잠드는데 한참이 걸렸다. 이 도시에 와서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니 그 답답함의 실체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중 하나는 나에게도 '퇴근 후 가족들과의 시간'이라는 행복함이 주어졌지만 그 행복의 시간은 짧고, 곧 다가올 내일에 대한 걱정을 미리 사서 하느라 온전히 행복하지 못했던 것. 다른 한 가지는 밝은 하늘을 볼 시간이 적다는 것. 내가 행복함을 느끼는 것 중 날씨와 시간의 흐름을 만끽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모두 모니터를 보거나 감정소비가 큰 대화를 하느라 놓치고 있었던 것.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지금의 행복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조금 더 앞에 있는, 혹은 저 멀리 있는 행복을 미리 갈망하며 지금을 깎아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당장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이건 잠시 후면 사라질 것, 행복 반대편의 불행을 더 크게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리프레시를 위해 온 여행에서 나는 지금 나에게 잠시 쉬어가는 것보다 다른 리프레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짧게 생각했지만 긴 여운이 있었던 시간. 간단히 요기를 하고 코펜하겐의 오랜 아름다운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냥 도시의 야경이 아닌 환상적인 야경, 티볼리 놀이공원으로 갔다.


입장권만 끊고 들어간 놀이공원은 대낮처럼 사람이 많았다. 꽃과 조명, 이국적인 조형물로 채워진 티볼리는 18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하늘색 마저 황홀하고, 운영 종료된 회전목마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중앙 분수대로 가니 더 장관이 펼쳐졌고, 해가 완전히 지면 와봐야겠다고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하늘색에 더 돋보이는 화려한 조명. 

마치 1년 내내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화려한 조명에 놀이공원 구석구석을 다니며 구경했다. 도심 속에 이런 놀이공원이라니! 롯데월드가 생각나기도 했고,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동심이란 또 어떤 행복을 주는 걸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더 생각나는 우리 가족과 친구들. 돌아갈 가족이 있고, 행복한 순간에 떠올릴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혼자 하는 여행 한 편에 있던 외로움이 좀 채워지는 듯했다.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여행의 막바지가 아쉽기도, 빨리 돌아가서 모두에게 나누고 싶기도 한 마음으로 9월 5일을 마무리했다.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의 나머지는 다시 빌라코펜하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디자인과 미식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 이야기는 사진으로 예고하며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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