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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트 Apr 29. 2024

경험의 시간을 다듬으면 분위기가 된다.

릴 베이커리에서 사워도우를 먹으며 분위기에 대해 생각했다.

늘 여행의 끝으로 갈수록 무탈히 지내다 가자는 마음으로 안전하고 꽤 괜찮은 호텔을 예약하곤 하는데 이번 여행은 어쩌다 보니 풀 호텔 코스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빌라 코펜하겐. 3박 4일을 보냈던 코코호텔을 아침 일찍 나와 15분 정도 걸어 도착했다. 역시나 밝은 아침 채광과 활기찬 분위기가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난 객실은 철로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또 다른 뷰를 보고 싶어 이야기했더니 코트야드가 보이는 객실이 조용한 편이라 매니저 추천으로 배정받았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코트야드뷰'가 사실 기대했던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용한 객실임은 확실했다. 그래도 총 3일을 지내면서 다른 뷰 객실에 머물 수 있어서 좋았다. 


짐을 맡겨두고 릴 베이커리로 서둘러 출발했다. 릴 베이커리는 코펜하겐 동쪽 끝에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기에 중앙역으로 가서 원데이 교통권을 끊었다. 여행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여행은 늘 재미를 더해준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 타면 현지인들의 삶을 체험해 보는 기분이 들고, 해 질 녘에는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며 노을을 구경하면 뷰 좋은 루프탑 레스토랑 못지않은 황홀함을 안겨준다. 한국에서는 2호선을 타고 합정-당산을 오고 갈 때, 3호선을 타고 동호대교를 건널 때 늘 그 시간을 최대한 만끽한다. 


코펜하겐 1일 대중교통 이용권은 90 크로네로 만칠천 원 정도였다. 편도로 끊을까 고민했지만 동쪽 끝까지 갔다가 이동이 꽤 긴 코스에 봐야 할 거리가 많아서 맘 편히 24시간 교통패스를 선택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공기에 볼을 갖다 대며 20분쯤 달리는 동안 풍경이 여러 번 바뀌었다. 도시에서 점점 한적한 호숫가 마을로 들어갈수록 여행객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남았다. 종점이라 버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내리더니 모두 릴 베이커리 쪽으로 이동했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와서 한 곳을 가기 위해 한 버스에 있었다니 괜히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초록이 80%를 차지하는 풍경에 갑자기 또 다른 도시에 떨어진듯한 느낌이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슬슬 걸어가니 바로 나타난 릴 베이커리. 카페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풍경이었다. 하지만 아침 9시가 조금 지난 이른 시간에도 야외 테이블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그 뒤로 주문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사실 안국 런던베이글에만 가도 볼 수 있는 풍경인데 뭔가 나도 모르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정수리가 금방 뜨거워질 만큼 햇빛이 강한 날이었는데 다들 그 해를 즐기러 테라스에 많이 앉는 편이었다. 햇빛에 후끈해진 실내 2층에는 대부분 관광객들이 많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릴 베이커리의 시그니쳐 씬이라고 할 수 있는 풍경은 2층에서 봐야 가장 잘 보이기 때문. 


한 5분쯤 줄을 서서 기다렸다. 프롤로그(Prolog)의 원두를 취급하고 있었고, 각종 브랜드의 맥주가 있어서 만약 친구들과 왔다면 테라스에서 낮맥을 하고 싶었다. 

줄 서는 동안 선글라스 뒤로 눈을 요리조리 굴려가며 공간을 이용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운영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공간 곳곳에서 묻어나는 따라 하기 힘든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때 나는 자연스러움 이란 억지로 연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닮은 소재를 사용하고, 따뜻한 컬러를 사용하고, 이런 인테리어적 요소로 어느 정도 분위기의 카테고리는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자연스러움의 밀도를 높이는 데에는 그 이상의 경험에서 묻어나는 디테일이 필요하다. 공간 내 사람들의 말과 행동, 규율, 그들만의 루틴, 빛과 온도, 내부와 외부의 조화와 대조, 공간 내 사물과 이를 이루는 물질, 그래픽과 컬러 등 그들만의 분위기로 만들어 나가는 것. 

간혹 1호점 에서 큰 감동을 받고 2,3호점을 갔다가 엥? 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다. 브랜드의 철학을 담은 1호점을 그대로 2호점에 옮긴 경우가 대부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의 고유한 캐릭터는 고수하는 것이 일관성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장소는 없는 것. 주변 환경과 공간의 구조, 안팎을 이루는 요소들을 고려해 2,3호점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코어와 폭넓은 경험, 이를 또다시 코어를 통한 필터링을 거쳐 해석해 내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브랜드와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이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더 큰 감동을 받고 애정을 쏟는 것이 아닐까!


여행 이후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Atmosphere)'를 읽으며 그 감동과 깨달음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대기, 공기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분위기란 정말 그 공기를 통해 피부로 느껴지는 데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기다림 끝에 나는 아이스커피와 아침메뉴 중 사워도우와 버터, 치즈, 잼 플레이트를 주문했다. 아뜰리에 셉템버에서 데니쉬 플레이트를 먹어본 이후 두 번째. 사실 한국에서 백반을 먹는 것과 비슷한 식이라 크게 다를 게 없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첫 입을 먹어본 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릴 베이커리의 주문 방식은 카운터에서 주문 후 음료는 대부분 바로 가져가고, 나머지 메뉴는 자리로 서빙해 준다. 커트러리는 셀프로 골라 가져가면 되는데 익숙한 듯한 방식이지만 모두 다른 빈티지처럼 보이는 커트러리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운 좋게 2층에 자리가 생겨서 올라가 1층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위에서 훤히 보이는 주방은 앉아서 하루종일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빠르고 질서 있게 움직이는 손길, 대화는 짧지만 늘 미소로 이야기 주고받는 직원들의 모습은 음식을 맛보기 전에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빛바랜 색을 띠는 공간에서 몇몇 채도 높은 사물들은 사랑스러움을 담당하는 듯했다. 


코펜하겐서 아이스커피는 늘 얼음 없는 시원한 커피만 마셨는데 릴 베이커리에서 꽤 큰 얼음 조각이 들어있는 시원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한국의 아이스커피,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다른 방식에 맛도 달랐는데 그들의 음식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 다양한 산미를 맛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애플&살구 잼과 휩버터, 치즈와 사워도우가 서빙되었다. 내 손바닥 보다 큰 치즈와 빵을 보고 다 먹을 수 있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사워도우를 집어 들자 얇고 바삭한 테두리에 촉촉한 빵 안쪽면이 느껴졌고, 휩버터와 치즈를 잘라 올려 한 입 먹자마자 새콤, 고소, 살짝 달콤한 풍미가 입 안 가득했다. (한국인에게는 잘 지은 쌀밥에 맛있는 반찬을 올려 크게 한 숟가락 먹는 느낌이랄까?) 와.. 이 사워도우의 신맛을 어쩜 잘 잡아줄까? 나 이거 금방 먹겠는데? 하며 접시를 순식간에 비웠다. 커피가 양이 적은 편이라 목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먹는 내내 침샘을 자극하는 조합에 커피도 알맞게 마실 수 있었다. 


릴베이커리에서 먹어본 데니쉬 브렉퍼스트. 신선한 음식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사워도우와 치즈, 휩버터, 잼. 담백한 한 플레이트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을 집는 손의 감각, 입술과 혀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슷한 조합을 여러 곳에서 먹어본 경험에 빗대에 보면 기본기가 가장 중요한 만큼 어렵다는 말이 맞나 보다. 한국에서 밥 맛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이들에게는 빵과 치즈가 그렇지 않을까? 



코펜하겐에서 데니쉬 브렉퍼스트는 세 번 정도 먹어본 것 같다. 여행 후 다양한 데니쉬 스타일 레시피를 찾아보면서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만들어봐야겠다 싶어 요즘은 빵을 굽고 있다. 생각보다 집에서 따라 하기에는 어려운 빵도 있지만 발효 시간을 기다리고 빵이 구워지는 오븐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즐겁다. 그리고 덴마크에 대한 나의 애정을 다시 일깨워준 에디션덴마크에 몇 번 들러서 식사를 하고 커피, 디저트를 먹으며 덴마크를 참 잘 담았다고 생각했다. 로컬 재료와 레시피, 그리고 그들의 방식까지 많이 고려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이 브랜드가 아주 오래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금 나와 내 친구들, 그 자식과 그들이 우리 나이가 되어서 또 애용하는 브랜드가 될 수 있길. 


여행 후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를 담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브런치에 기록하는 것도 그중 하나. 

처음에는 '나'에 시작해 나를 담은 브랜드를 만들자니 어느 한 부분에만 집중된 취향이 그 중심을 이루었고, 그러다 보니 다음날 보면 내 취향이 아닌 듯한 낯선 느낌에 오늘의 나, 내일의 나, 그다음 날의 나의 충돌이 일어났다. 몇 번의 충돌 후 깨달은 건 그동안 내 경험을 너무 경험과 1차적 기록에만 고여있게 했던 것. 경험 이후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하고 느낀 것들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고,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유하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순환하는 것들을 세상에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보려 한다.


다음 화에서는 현대미술관을 거쳐 덴마크의 아름다운 디자인 브랜드 쇼룸, 운하를 산책하며 '윤슬을 가까이 두는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한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여행의 끝이 다가올수록 천천히, 밀도를 높이는 탐구와 사색을 더 하게된다. 이번 11화 마무리도 사진으로 예고하는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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