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 Apr 23. 2018

아름다운 선암사에 홀리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굴목이재를 넘었다.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와송(臥松)이라 불렀다. 수없는 살생의 환란에 살아남은 죄가 슬픔의 석회화일까.

등 굽은 슬픔에게 기대어 시(詩)처럼 울어서야.

전란과 피폐했던 세월을 묵묵히 건너온 절간에 국사들의 정진은 부도탑으로 잠들어 있었다.


어느 깊은 산자락의 기와집 같은 수행처, 인위적 기교를 배제한 해우소, 전쟁과 로마인 이야기가 떠오르던 아치형 승선교, 수수한 대웅전 뒷뜰에 흐드러진 꽃가지들, 오늘은 꽃비로 나린 왕벚꽃 꽃잎. 꽃잎들.  

마음이 홀린 것은 그 많은 아름다움보다도 단청을 벗고도 당당한, 정직하게 수수한 대웅전 처마였다.

끌림이 부석사 무량수전 이상이었다.

와송과 해우소 곁을 지나 편백나무가 숲을 이룬 곳으로 걸어갔다. 은근한 오름길을 제법 걷고 정상 직전의 가파른 딸각고개를 10 여분 오르니 하산 길이 시작되었다. 내림길의 끝에는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정신을 서늘하게 만드는 송광사가 있었다.

대웅전 부처님 전에 무릎을 꿇고 '고요하게 살다 가게 하소서' 발원했다. 그가 공부하던 시절과 법정 스님을 뵈러 내려왔던 얘기를 나누며 대웅전 앞마당 연등 아래를 한가하게 거닐었다.

종일토록 비가 오는 듯 그치는 듯,  숲과 사람을 촉촉하게 적셨다. 물기 머금은 연초록들이 물씬한 향을 쏟아냈다.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리지는 않았지만, 낯설게 노래하는 새가 악기의 현처럼 고운 소리를 냈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굴목이재에서 지천으로 살고 있는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의 새잎만큼이나 생동감 있었다.


조계산 동쪽과 서쪽의, 태고종 총본산 선암사와 승보 사찰 송광사를 잇는 굴목이재. 눈 맑고 마음 맑은 선지식들이 걸었던 한국의 산티아고를 걸으며 내 영혼의 방향을 스스로 묻고 답해 보았다. 


새로운 한 주의 아침이 굵은 빗방울로 통유리를 뿌옇게 가리며 열리고 있다.

아름다운 선암사에 홀마음은 여전히 달콤하다.

                                            

                                             -  2018.4.23.(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