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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 Sep 26. 2018

그토록 많은 풍경이 내게로

굴업도에서

산이 바다로 내려앉고 바다가 산으로 기어올랐다.
평등 정신 같은 소사나무 숲에서 자유 정신으로 노닐던 사슴들은 풀을 뜯다가 모래 언덕에 발자국을 숨김없이 남겼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대문도 없었다. 바다와 산과 하늘만 있는 마을에 예닐곱 가구가 돌아가며 이장집이고, 피마자 열매가 익어가고, 늙은 호박이 한가로이 나뒹굴었다. 인위와 작위가 배제된, 본디의 생태 섬에서 영혼이 푸른 숨을 쉬었다.

교감하고 싶은 소사나무였다. 손끝에 닿는 가지에서 생명의 정감을 느끼며 개머리 능선을 여유롭게 올랐다.
매미만큼 포동한 메뚜기가 걸음을 막으며 폴짝거렸다. 쉽게 잡혀 손끝에서 한참 재주를 부렸다. 흩날리는 꽃잎인 줄 알았다. 엄지 손톱만한 나비는 옷깃을 스치며 살갑게 나풀거렸다.

사슴 무리를 만났다.

레저 단지 조성을 위해 섬을 사들인 기업에서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두 마리를 기증한 것이 세월이 흘러 100 여 마리가 야생 사슴으로 살고 있었다.(이제 200 여 마리가 될 걸.라고 했다.)

바다가 보이는 순하디 순한 능선에서 백패킹을 즐기는 청년들이 풍경으로 동화되었다. 추운 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진심이었다.

수크렁이 끝없이 펼쳐진 언덕으로 석양이 황홀하게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허리 가는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어 바닷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노래처럼 집단무처럼.

서쪽 바다가 연출하는 일몰 풍광에 빠졌다가 몸을 돌리니 동쪽 바다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구름과 바다가 여운의 아름다움을 오래 품고 있긴 했다만 지는 해는 순간이었다.


펑퍼짐한 돌을 찾아 여유롭게 달을 기다렸다.

구름에 가려 초승달처럼, 때로는 반달처럼, 꾸물거리던 보름달이 바다 위로 두둥실 떠오른 순간에 탄성과 박수로 맞이했다. 온전한 자연, 온전한 심취였다.


달빛 어린 물결이 은비늘처럼 일렁이는 곳에 토끼섬이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기계적인 점멸을 반복하는 초록 점 하나가 외로이 문명이었다.

사슴이 잠든 산과 언덕, 바닷바람에 화답하는 수크렁의 나긋한 노래, 수천 년 파도에 인내한 세월예술처럼 승화한 해안 절벽, 그리고 우리들의 평화.. 소중하게 기억할 것이다.


  "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쟝 꼭뜨 "


소라 껍질이 되어 바다의 소리를 나도 들었다. 파도가 점점 소리를 높였다.


마을이 가까운 큰말해변으로 내려가는 어둑한 길은 정겨운 소사나무의 가지와 달빛을 믿으면 그만이었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연평산은 이른 아침에 올랐다. 섬의 북쪽이었다.

낮은 산이었으나 사구도 있고, 벼랑도 있고, 바위도 있고, 밧줄도 있었다.
역시 소사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어김없이 사슴 냄새가 났다. 서리태 콩을 꼭 닮은 배설물 때문이었다. 새싹조차 다 뜯어먹고 이 산 저 산 좋은 풀만 찾아다니는 굴업도의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도 아니고 '관(冠)이 향그러운 무척 높은 족속'도 아니었다. 굴업도 한량들이었다.


연평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바다는 근엄하게 푸르렀고, 코끼리 바위가 보이는 앞 바다에서는 파도가 밀려오며 겹주름을 만들었다.

아기의 심성이 연상되는 결고운 모래는 고둥의 숨은 집을 차마 감추지 못했고, 거무튀튀한 갯바위를 들추면 검은 게의 무리가 우르르 흩어졌다. 건네준 한 마리를 받아 집었더니 생명 의지가 가히 교훈적이었다. 괜한 발악으로 발톱인지 무언지 제 몸 한 곳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바다로 돌아갔다.

굴업도와 인천을 잇는 환승 섬인 덕적도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소야도까지 가볍게 트레킹을 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자들과 일만이천 명의 포로를 당나라로 데려갔던 소정방.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기 위해 우군인 당나라 소정방을 마중왔던 섬이라 소야도였다. 아득한 600년대의 역사가 슬펐다.


공중으로 헬리곱터가 연달아 오갔다. 이름 모를 섬이 불타고 있었다.

어느 섬이 불타고 있었다.

짝수 날 들어갔다가 홀수 날에 섬을 나온 탓에 인근의 작은 섬들을 경유하는 선박의 홀짝 가변 운영으로 트레킹 외적인 시간이 여유로웠다.
승선을 기다리는 동안 바닷물이 쓸려나간 자리에  평상같은 바위를 찾아 아구포를 뜯노라면 바닷물이 서서히 밀려와 바위의 허리를 감쌌다. 두려움 없이 낭만이었다.


그토록 많은 풍경이 내게로 왔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과 더불어 푸른 숨을 쉬며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어서 진정으로 행복했다. 해가 지고 나뭇잎이 떨어지듯, 언젠가의 어떤 날에 자연으로 돌아갈 나의 죽음이 저항없이 고요하기를 소망했다. 



                                               - 2018. 9.24 ~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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