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Feb 09. 2021

동봉을 오르며

올 겨울에는 자주 등산을 하고자 마음먹었지만 입춘이 지나고서야 팔공산을 찾게 되었다. 산은 언제나 말없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품어준다. 등산로 입구의 텅 빈 야영장의 황량함 마저도 운치가 있었다. 오랜만의 등산에 호흡이 쉽게 터지지 않아 깔딱 고개를 지나고 염불암에 다다르서야 호흡이 조금 나아졌다. 평일이어서 등산객은 아주 드물어 미세하게 떨리는 나뭇잎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오고, 내 거친 숨소리가 괜히 민망하게 느껴졌다.

적막한 산 중턱 계곡 너머에서 규칙적으로 딱딱거리는 소리가 들려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나무들 사이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새가 부리로 나무를 열심히 쪼아대고 있었다. 어릴 적 만화영화에서 아주 유쾌한 캐릭터로 그려졌던 딱따구리인 것 같았다. 만화 주인공을 현실에서 직접 만나다니! 그러나 현실은 끊임없이 부리로 쪼아야 깊은 산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이다. 새나 인간이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삶은 수고스럽다.

이름은 이제 생각나지 않지만, 만화 속 딱따구리의 익살스러운 웃음소리를 기가 막히게 따라 했던 어릴 적 친구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겨울이면 특히 산이 그립다.

흙을 밟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바삭바삭해진 듯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언젠가 태백산에서 황홀하게 보았던 눈꽃이 생각났다. 눈이,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바람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누가 처음 그것을 꽃이라고 불렀을까.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이름을 불러주어서 비로소 꽃이 될 수 있었는지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 내가 불러주는 사람들의 이름도 그와 같기를.


동봉까지 300미터가 남았다는 표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리며 물을 마시고 있으니, 아까 나를 바람처럼 스치듯 지나간 젊은 남자가 어느새 하산을 하며 다시 스쳐 지나갔다. 후드티 한 장에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채 다람쥐처럼 쪼르르 내려가는 청년의 경쾌함이 부러웠다. 그 무모함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그 모습을 보니 스무 살이 되던 해 친구들 몇몇과 지리산에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 두 명과 동네서 어슬렁거리며 놀다가 아버지 차를 가지고 온 친구의 야, 타! 한마디에, 우리들은 얼떨결에 차를 타고 그대로 지리산으로 향했다.

허름한 민박집에서 술에 취해 서로가 뒤엉켜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가장 부지런한 친구의 새벽을 알리는 소리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중산리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지리산을, 나는 평상복 그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청바지에 단화 구두만 달랑 신고 천왕봉에 올랐다. 왕복 일곱 시간도 넘게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포경수술을 하고 실밥도 풀지 않은 채 같이 갔던 친구도 있었으니 그때 우리의 무모함이 오늘 본 청년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해가져서 어둑어둑해진 산길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내려오면서도, 불안감보다 더 앞선 성취감에 희열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지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좀 아찔한 생각이 든다.


건강한 혈색이 도는 빨개진 얼굴로 맨손을 호호 불며 손을 녹이는 청년을 바라보는 오늘의 나처럼, 동네 마실 나오는 듯한 복장으로 꽁꽁 언 손 녹여가며 성큼성큼 등반을 하던 그때의 우리들을 바라보던 중년의 등산객들도, 무모함이 때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전 01화 oo동 아지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