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30분. 가족들이 모두 자기 방에 들어가고 나만 남은 고요한 거실. 덩그러니 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TV가 보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온 가족이 함께 영화도 보고, 예능도 보곤 했었다. 요즘 TV를 켜는 일은 일주일에 많아야 한 두 시간 남짓. 그것도 누구랑 함께 보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금요일 밤 맥주 한잔 하며 틀어놓는 별 의미 없는 시청이 전부다. 오랜만에 TV를 켰다.
홈쇼핑, 드라마, 예능, 스포츠... 리모컨으로 채널을 빠르게 돌리니 소리들이 다 뭉그러져 웅웅 소음을 만들어 낸다. 전원 스위치를 끄려는데 '나 혼자 산다'라는 나의 최애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일단 멈춤!
TV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가 부모님의 환갑을 축하하는 장면이 송출 중이었다. 가족이 함께 매년 가족사진을 찍고, 생일 축하 노래 영상을 보내주고, 크리스마스 파티 영상을 보내주는 모습은 퍽 낯설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런 화목하고 긍정적인 가정에서 자란 대니 구가 부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은 다툼이 잦은 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세 가족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괜스레 방에 잘 있는 아이를 불렀다.
"아들, 이것 좀 봐봐. 우리도 가족사진 찍을까? 저 사람들처럼."
"엄마, 우리 가족도 충분히 사이좋아요. 친구들이 엄마랑 사이좋다고 나 부러워하는데. 그리고 우리 가족여행 자주 가서 사진 많이 있지 않아요?"
그렇다. 거의 분기별로 가족 여행을 가는 편이라 사진은 있는 편이다. 그리고 매년 가족앨범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가족사진은 '여행 중 우연히 찍은 것 말고 저렇게 컨셉을 잡고 찍은 진짜 가족사진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아들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건넸다. 내가 생각한 진짜 가족사진의 의미를 나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진짜 가족사진
TV를 끌까 하고 채널을 돌리니 금쪽상담소라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90년대 인기가 있었던 투투라는 그룹의 '황혜영'이 아이 양육 방식에 대한 솔루션을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떠나버린 트라우마가 40세가 넘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황혜영'을 괴롭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비정상적인 양육 태도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이되고 있었다. 내가 받은 고통이 아이에게도 대물림 된다는 것은 부모에게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울고 있는 '황혜영'을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니까. 한편으론 부모님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방금 전까지 부러웠던 것들이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진짜 가족사진은 가족들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었다. 어느 한순간도 우연이 없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수없이 만난다. 태어난 나라, 부모, 재능, 장애, 성별 등. '대니 구'나 '황혜영'이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다. 긍정을 장착하고 불행한 현실에서 나를 끄집어내는 일,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삶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