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둥 가족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일요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출발 전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남편과 나의 컨디션 하지만 우리는 떠났다. 어렵사리 호텔로 온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남편만 호텔방에 둔 뒤 나는 아이와 나와 경주시내로 들어갔다. 아이에게 계속해서 '흐린 날을 즐길 수 있어야 일등인 거야, 흐린 날도 흐린 날대로 좋은 거야'라며 자꾸만 세뇌교육을 시켰다. 사실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경주의 벚꽃은 아직 꽃봉오리만 맺혀있고 피질 못했다. 바람은 불고, 비는 오고 춥고 배도 고팠다. 나는 아이와 대릉원 주위에 차를 대어놓고 그냥 첨성대부터 저기 봉황대까지 걸어가면서 먹을 곳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와 같이 돌아다녔다. 가는 도중에 만개한 목련나무도 보았지만 나에게 큰 감흥은 주지 못했다. 아이에게 큰소리쳤던 거와는 달리, 난 약간은 지쳐있었다. 아이에게 간식을 쥐어주고 그곳을 좀 걷다가 따뜻한 콩국을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숙소로 와서 친구와 사우나를 하고 나서야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곤 나와 보문 호수 근처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켰다. 아픈 남편은 호텔 숙소에 있고 아이에겐 TV를 틀어놓고, 1989 - 그 편의점의 옛날 노래에 그냥 눈물이 주르륵 났다. '아 이렇게 가깝고 좋은걸 왜 난 지금 네가 아프고 나서야 하기 시작한 걸까? 메멘토 모리 - 죽음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그렇게 싸우고 일상에서 즐길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을 유예하며 내일을 위해 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와 회환의 감정이 올라왔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난 너무 계획하며 살았던 거 같다. 하지만 그 계획 중 그 어떤 것도 내 플랜대로 흘러간 건 없다. 그냥 되는대로 살아도 되었는데, 그냥 그 하루하루가 주는 행복을 만끽하고 감사해하며 살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순간에도 내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걸 하고 나면 저걸 하고, 몇 년 뒤에 이걸 하고 저걸 하고 뭐 이딴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딴 게 다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사실, 그래서 이번 여행도 준비한 거였다. 그냥 좀 즐기자, 그리고 날씨가 안 좋아도, 그냥 신이 내게 내어주신 그 하루하루의 풍족함과 완전함을 감사해하며 즐겨야 되지 않겠어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집 조식은 참 맛있네, 종일 날씨도 춥고 흐렸지만 그래도 이 집 아침은 맛있었던 거 같다.
여하튼, 이것 또한 신이 내게 내어주신 선물 같은 날이었다. 내 머릿속의 벚꽃이 만개한 보문호수와 대릉원 돌담길, 화창한 경주 뭐 이런 건 없었지만, 우린 그 흐린 날씨 속에서 쫀드기를 사 먹었고, 대릉원 돌담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콩국도 먹었고, 또 우여곡절 보문호수에서 맥주 한잔을 했고, 그 나름대로 따뜻한 목욕탕에서 피로를 풀었다. 생각한 대로 뭐 하나 흘러간 건 하나도 없지만, 남편은 여행 내내 호텔방에 있었고, 그 얼굴이 시컴했고 기운이 없었지만 아이와 난 그냥 또 그렇게 챕터 한 장을 우리만의 작은 에피소드로 채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하루하루 삶이 내게 허락한 모든 순간을 그냥 감사해 보자. 그 어떤 것도 허투루 신께서 주지 않으셨을 거라 믿는다. 이런 흐린 날씨도, 피지 못했던 벚꽃조차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고, 난 그냥 그 하루를 있는 그대로, 주어진 대로 즐기면 된다. 내 머릿속의 그 계획과 상상은 지워버리고 그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징징거리지 않고, 그 하루하루 주어진 것에 맞춰서 사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다. 그 연습을 제대로 한번 해본 여행이었다. 쫀드기도 먹었고, 콩국도 먹어봤고 만개한 목련도 봤으니 말이다. 그 나름 재미있었네.
아담 그랜트의 인스타에 나온 글
"Resilience is not about being invulnerable to hardship. It's about accepting adversity as part of life. "
회복력이란 역경에 취약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회복력이란 역경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궂은 날씨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