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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기적은 지금 여기에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by 따뜻한 불꽃 소예

나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썼다. 불안, 결핍, 두려움...그러나 놓아보니 남아 있는 건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삶은 이미 기적이었다.


제주도, 여행 속의 마음

가족여행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나와 아들은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에 들떠 있었고, 그래서인지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야 했던 비행이 그에게는 이미 고통이었고,

도착 직후부터 피로와 통증으로 지쳐 보였다. 여행 내내 그는 많이 힘들어했다.

첫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몸이 불편한 그는 자주 짜증을 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 깊이 흔들렸다.

중간중간, 그의 통증은 극심해졌고 그럴수록 그의 표정은 더 굳어졌고, 말투는 거칠어졌다. 나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말조차 제대로 듣지 않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는 차가운 미움이 자라나기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지?" "왜 나까지 지쳐야 하지?" 그렇게 스스로에게도 묻고 또 묻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여행을 기대했고, 함께 웃는 순간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바란 풍경과는 달랐고, 나는 그 차이 속에서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음에 대하여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과거를 곱씹었고,

그를 만났던 내 운명과 그 선택을 원망했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것조차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매일 밤 암성통증으로 잠들기 어려워하고, 살갗이 따가워 옷을 입는 것도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과 나에게 여느 듬직한 아빠, 남편이 되지 못한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다.

두 발로 걷고 있다.

흉수로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응급의학과 의사의 말도, 암이 자라고 있다는 종양학과 선생님의 말도 모두 맞다. 예전보다 확실히 체력도 떨어지고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살아 있고,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심지어 등산도 간다.


나는 왜 자꾸만 내 접시에 놓인 것보다 잃어버린 그 무엇을 쳐다보며 푸념만 하고 있을까.

왜 감사하지 못하는 걸까.


신은 분명 기적을 내게 주었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남편은 가끔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공부를 도와준다. 아이에게 신경질을 내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암은 피로와 과로, 무리한 삶으로 재발한다고 들었다. 돌이켜보면, 남편은 정말 많이 힘들었다.

너무 없이 자랐고, 아득바득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기 능력치를 넘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어쩌면 그는 '성공 포르노'에 속아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완벽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자신을 불태워 살아갈 수만은 없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멈추고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 두 명제가 있다면 Live to work와 Work to live 중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

돈과 명예는 삶의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삶은 아니다. 나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일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휴가를 더 많이 써야겠다.

내게 주어진 이 한정된 시간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놓아줄수록 더 가벼워지고, 수용할수록 더 깊어지고, 지금 여기에 있을수록 더 충만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여정을 통해 알았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삶 속에 이미 스며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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