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 보이지 않는 감옥 안에 내가 있었다.
무명(無明)
주말에 아들과 넷플렉스에 나온 인도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봤다. 별 기대 없이 틀었던 영화가 내게 또 하나의 거울이 되어 다가왔다. 등장인물은 과자를 만드는 하층 카스트 출신의 청년, 발람. 그는 대대로 가난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일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듯했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그는 영어를 빨리 습득했지만, 가난은 더 이상의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묵묵히 일을 해야 하는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주의 아들이 운전기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기지를 발휘한다. 조금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노예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 집에 머무르며 그는 점점 '깨닫기' 시작한다. 그토록 높아 보였던 주인의 삶이 실은 위선과 부패로 얼룩져 있음을. 그가 주인의 발이나 닦아주며 평생 살다가 병들거나 필요가 없어지며 버려진다는 인식,
사실 그 닭장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믿음은 그 자신과 사회가 만든 환상, 곧 무명(無明)이었다.
"The moment you recognize what is beautiful in this world, you stop being a slave."
그는 어느 날 조카와 함께 동물원에 갔다가 백호(White Tiger)를 본다. 그 찰나에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 것 살아온 한계는 실제 장벽이 아닌, 내면에 새겨진 감옥이었다는 걸.
나는 이 장면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문득, 내 삶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직장, 시댁, 친정, 남편, 아이, 집안일, 회사의 불합리한 구조, 그리고 늘 나만이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감.
이 고통의 굴레를 바라보며,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더러운 운명, 어쩔 수가 없구나.'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게 정말 '현실'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내 무명이었다.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무명 - 딸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내가 다 케어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그 강박, 그것이 진짜 내 것인가?
소란 피우지 말자, 나만 참으면 된다는 두려움의 무명 - 조신한 여성으로서 결코 남과 다투어선 안되고, 갈등은 피하고, 내 감정을 삼켜야 한다. 불만이 있어도 삼켜라. 그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나는 이 상황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무명 - 난 정녕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이 닭장의 문을 스스로 닫은 건 아닐까? 나는 나갈 수 있고, 날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래. 나는 이 고통을 선택하지 않겠다.
나는 이 고통을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전환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시간은, 단지 내가 나로 돌아가는 길목일 뿐이다. 언젠가 잊었던 나를 다시 기억해 내는 여정이고, 나는 내가 되고자 했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발람처럼 나도 이제 안다. 지금 이 한계는 허상이다. 나를 가두었던 건 바깥이 아니라,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내 안의 무명이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티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전환을 감지하고, 가능성을 지각하고, '나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였다.
지금은 단지 나로 가기 위해 지나쳐 가야 하는 하나의 길에 불과하며, 나는 결국 다시 나로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