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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구리 May 24. 2022

베이스캠프 루틴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


[베이스캠프 루틴]


 새벽 깨쯤부터 걷기 시작해서 오후 4-5시 즈음이면 다음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게 된다. 순서는 때에 따라 다르지만 아래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


 첫째. 난로에 젖은 신발, 옷가지들을 늘어놓고 말린다. 아무래도 장시간 동안 트레킹을 하고, 씻는 것도 여의치 않다 보니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이 ‘스타일’이었다. _겨울엔 얼어 죽고, 여름엔 더워 죽는다는 멋 부리는 나에게는 제법 커다란 포기 중에 하나였다._  무게를 최대한 줄인 배낭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내의와 주행용 옷가지들, 보온용 플리스 한 벌, 눈비를 막아줄 고어텍스 재킷 한 벌.
 스타일은 부재하지만, 위생 감은 유지해야 했기에 모두가 젖은_비에 젖은 생쥐처럼 머리카락까지 축축이 젖은 우리의 몸뚱이도 마찬가지_ 것들을 난로가에 널어두곤 한다.

난로에서의 시간은 늘 행복하다. 모두가 따뜻한 곳을 양보하곤 했다.

 둘째. 통신이 끊겨 카메라로 쓰이기 시작한 휴대폰을 충전하기 위한 전기 찾기.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퇴색되거나 잊히기 마련이다. 지난가는 아름다운 기억들을 잠시나마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진 찍기였다.

 카메라 외엔 모든 기능을 잃어버렸지만, 사실 이 기능'만'이 필요하기에 필사적으로 콘센트를 찾곤 했다. 물론 종국에 이르러서는 전기를 사는 일까지도 발생했지만.


 셋째. 고단 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을 위한 식사 준비. 사실 베이스캠프에서 여러 가지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거의 쌀밥, 프랜치 프라이즈, 샐러드 _말은 샐러드지만 오이나 당근 따위를 썰어놓은 것_ 그리고 달걀부침 따위를 주문하곤 했다. 그리곤 가방 깊숙한 곳에서 튜브형 고추장, 컵라면 등 가져온 것들을 꺼내 곁들여 먹곤 했다. 사실 이렇게 지극히 한국형 식사를 하게 된 것은 까닭이 있는데. 첫날 네팔 전통음식 경험을 해보자며 호기롭게 주문한 칠면조 모모 _우리나라 음식으로 따지면 만두와 비슷한데, 밀가루 피가 좀 더 두껍고 축축한 느낌이 난다._ 의 맛에 된 통 당한 까닭도 있고, 달밧에 금세 질려 버린 탓도 있었다.

 어쨌든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당연하게도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하며 주문을 하곤 했다.

베이스캠프의 주방, 그리고 우리가 저녁이면 먹던 음식들, 지금 와서 보니 탄수화물 파티였구나

 넷째. 주전자에 눈을 가득 퍼 녹인다. 뜨거워 이제 끓기 시작하는 눈을 각자 가져온 물병에 담아 미리 펴 둔 침낭 안에 던져 넣어 둔다. 히말라야의 밤은 서울에서보다 길다. 보통 9시면  _사실은 장작이 다 타고나면 불빛도 없고, 하루 종일 걸은 피로감에 본인의 침낭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_ 다들 잠자리에 든다.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인지 침상인지 모를 것의 위에 산 밑에서 가져온 침낭을 펼치고, 어쩐지 꿉꿉한 냄새가 나는 솜인지 구스인지가 들어있는 이불을 덮고 자곤 했다.


 각자의 순서를 마치고 나면 어느새 고요한 어둠이 발 밑까지 닿아 헤드랜턴을 꺼내게 만든다. 그 시간이 오면 자연스레 우리 몫으로 할당된 장작들을 태우기 위해 불가로 모여 앉곤 했다. 한 손에는 각자의 취향이 담긴 차 한 잔 _취향이라고 해봤자 베이스캠프에서 판매하고 있는 커피, 짜이 티, 따뜻한 우유 정도겠지만_ 과자 대신 배낭 가장 깊은 곳에서 꺼내 온 조미김 따위를 들고선 말이다.


 시간이 많으면, 말이 많아진다고 하던가? 차를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보통은 서로 다녀왔던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어디로도 연락을 보낼  없게 되어버린 휴대폰은 이때만큼은 우리를 어디로든 보내주었다.

 

 각자의 핸드폰 속 갤러리에서 아주 조심스럽고도 소중한 추억을 내보인다.

 처음으로 혼자 간 여행지에서 마침 비어 페스티벌 기간이라 일주일 내내 취해있었다는 이야기. 좋아하는 축구팀의 경기를 보기 위한 여행이었다.라는 이야기, 고된 일정에 삼일 만에 코피를 쏟았다는 이야기 등등…


 모두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나면,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 목록이 조금 더 풍성해지곤 했다.


 장작의 불꽃이 조금씩 잦아든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다가오자 모두들 합이라도 맞춰본 것 인지, 고요와 손을 잡는다.

 조용해진 시간 속에서 허리 깨까지 쌓인 눈 위에 새로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에서의 행복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장작 한 조각, 차 한 잔, 이야기한 줄처럼 참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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