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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맑음 스튜디오 Jun 04. 2021

쌀국수 집의 UX

어떤 쌀국수집에서 알게 된 사용자 경험


  웹과 앱의 UX*도 알기 벅찬데 이젠 쌀국수에도 UX가 있냐?

진정하고 들어 보라, 그냥 회사 근처에 괜찮은 쌀국수 집을 알게 되어 소개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전 날에 술도 먹었겠다 뜨끈한 국물로 정신 못 차리는 위장을 혼내주려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 비우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쌀국수가 먹고 싶어 졌다. 그렇게 회사 동료 세 명과 함께 쌀국수를 먹으러 갔다.


  건물은 온통 나무 소재로 꽉꽉 막혀있고 이름 석자만 적혀있다. 미분당.

입구 옆에 키오스크로 쌀국수를 결제하여 주문하면 몇 분 후 종업원이 "세 분이시죠? 들어오세요."라고 굳건하던 나무 문을 열고 말했다.


테이블 앞에 적힌 안내문


  자리에 앉아 앞에 보이는 건 안내문이었다. 자리마다 모두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미분당은 누구나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주인의 뜻에서 탄생했습니다.




이제까지 알던 쌀국수 집들은 '쌀국수 맛있게 먹는 법' 정도만 적혀있는데 이 가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내한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리고 이 안내가 손님들에게 충분했는지 들어오자마자 잔잔한 음악만 들릴 뿐, 여럿이서 온 손님들도 모두 조용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정말 말없이 이 쌀국수 집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공간을 제공하려면 '조용해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한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이 의심은 든든한 쌀국수 한 그릇으로 해소되었다.

아래와 같은 요소들 덕분에 조용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손님끼리 마주 보지 않는다.


아무튼 와이어프레임이라고 생각하자


  가게의 내부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ㄷ자 모양의 테이블이 주방을 감싸고 있으며, 서로 마주 보는 테이블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한 사람과 같이 와도 대화가 어렵다. 단 둘이 온다면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겠지만 세 명 이상 모이면 음악소리 때문에 대화 소리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주방 앞에서 엄숙해지고 만다.


  이런 자리만 있는 것은 최대한 대화를 피하도록 하기 위함 같다. 회사 사람들끼리 오더라도 점심 후에 해야 할 일 얘기도, 최근에 뜨는 주식 종목과 코인 종목의 얘기도, 잠시 미뤄두고 대화를 멈추고 만다.






2. 만약 필요할 수 있는 물건은 각 테이블에 모두 있다.


  꼭 어디 외식을 할 때면 나는 흰 옷을 입고 있다. 그렇게 "저, 앞치마 좀 주세요." 종업원에게 말을 하게 된다.

가게 안에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봤자 여기저기서 "저 휴지 좀..", "저..", "저" 하는 비트만 추가할 뿐이다. 이런 상황을 쌀국수 집이 어떻게 대비할 수 있는가? 이곳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제공한다.

각 자리 뒤에는 옷걸이와 앞치마가 있다.


  뒤를 돌아보면 옷걸이에 걸린 앞치마가 있다. 앞치마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겨울에도 외투를 걸 수 있도록 옷걸이까지 제공한 것이다. 술집에 보면 드럼통 같은 의자 안에 옷을 넣어두기도 하는데 잘 열리지도 않고 뚜껑 열 때 요란해서 이 방법이 좋은 것 같다.


  게다가 일행과 함께 가게를 오게 되면 휴지 탁, 젓가락 탁, 숟가락 탁, 소위 '젓가락 세팅'을 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차단하여 각각의 자기 테이블 밑을 열어보면 세팅에 필요한 것이 모두에게 제공돼있다. 막내가 다 해주는 건 없다. 자기 인생의 막내는 자신이다.


  쌀국수가 나와 한입 먹고 맛있었다면 고개를 들어 해선장 소스를 봐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테이블보다 머리 위에 구비돼있다. 테이블 바로 위에 구비해놓으면 먹을 때 방해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위치에 각자 사용할 수 있는 휴지도 같이 준비되어있는데, 놀라운 것은 머리끈이 같이 준비돼있는 것이다. 국물이 있는 음식에 긴 머리의 사람들이 불편을 느낀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를 제공까지 해주는 음식점은 난생처음 봤다. 비록 내가 사용할 일은 없었으나 배려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3. 그래도 더 필요하다면 테이블 위에 올려두세요.

 

  처음 올려둔 사진을 보면 안내문 위에 '물, 반찬 기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위에다 올려두세요...'라고 적혀있다. 뜨거운 음식을 먹고 나면 물이 더 필요할 수 있고, 탄수화물에 탄수화물을 얹는 K디저트 '사리 추가'는 빼놓을 수 없었으니 이래저래 필요하다. 만약 필요하다면 말없이 그 접시를 올려두면 된다.


  정말 세세한 점이, 물은 당연히 물컵에 있지만 면이 담긴 그릇, 양파 등 야채가 담긴 그릇이 따로 존재한다. 주방 쪽에 올려진 그릇을 확인하고 더 주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안쪽이 주방이니 대기(로딩) 시간에도 나의 주문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다.





  크게 이런 세 가지의 이유로 이 쌀국수 집은 '조용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다. 가게를 나오고 문을 닫자마자 안에 들려오던 조용한 노래는 들리지도 않고 굳건히 닫혀 있다.


  그러자 금세 문이 또 열리며 "두 명이시죠? 들어오세요." 종업원이 안내했다.

'설마 입구에서 키오스크로 비동기 주문을 받기 때문에, 저렇게 꽉꽉 막아도 밖에 몇 명이 있는지 알 수 있고, 주문량도 알 수 있고, 종업원도 주문을 직접 안 받으니 인력도 효과적으로 줄이는 ㄱ..'




  까지 생각하다 '무슨 점심시간에도 이런 일 생각이냐'하면서 회사로 돌아갔다.

참고로 쌀국수도 정말 맛있었다.





*UX : 사용자 경험, User eXperience의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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