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근본적 피해의식
무의식의 시작,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많은 ‘억압’(상처)들이 있고, 무의식은 그 ‘억압’들로 인해 형성된다. 즉, 무의식은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적인 상처(억압)에 의해 형성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많은 ‘억압’들 중 가장 근본적인 ‘억압’은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그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무엇일까? 아들(딸)이 어머니(아버지)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김으로써 느끼게 되는 복합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것이 ‘무의식’을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억압’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 아들이 있다고 해보자. 아들은 물고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때 아버지는 그 애착을 좌절시킨다(“엄마한테서 떨어져!”). 아들은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인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게 된다.
이는 아이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렬하게 원했던 존재를 박탈당한 상처는 아이에게 충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했던 사람(첫사랑) 혹은 물건(장난감)을 처음으로 빼앗긴 아이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상처이겠는가? 바로 이 최초의 상처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근본적인 ‘억압’이다. 프로이트는 유아 시절, 어머니(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아버지(어머니)에 의해 좌절된 사건이 한 인간의 무의식을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억압’이라고 본다.
무의식의 중추적인 두 축, ‘부모’와 ‘성’
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가장 근본적인 ‘억압’인가? 이 ‘억압’은 1차적 관계(부모)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억압’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2차적(학교생활) 혹은 3차적 관계(사회생활)로 변주된다. 간절히 원했던 존재(엄마)를 박탈당했던 기억은 성인이 되어도 무의식에 남아 우리네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살아가면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마음들이 있다. 애정 결핍, 권위나 권력(선배‧교수‧사장…)에 대한 위축감, 거절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과도한 인정 욕구 등등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근본적인 ‘억압’의 변주로 본다. 애정 결핍은 어린 시절 박탈당한 어머니(사랑)의 결여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권위나 권력을 가진 이에 대한 위축감은 어머니를 박탈한 아버지에 대한 위축감이다. 또한 거절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다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과도한 인정 욕구는 박탈당한 어머니의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는 무의식적 욕망이다.
물론 이런 프로이트의 관점을 전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현재 프로이트의 이론에 관한 많은 반론들이 있다. ‘인간은 정말 부모를 성적으로 욕망하는가? 그리고 그 욕망이 좌절됨으로써 형성된 무의식이 정말 성인 이후의 삶마저 지배하는가?’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많은 이견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반론과 이견들을 감안하더라도, 인간의 무의식에 ‘부모’와 ‘성’이라는 두 항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부모’와 ‘성’이라는 두 항이 무의식의 중추적인 두 축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부모와 성, 피해의식의 근본적인 문제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피해의식 또한 ‘부모’와 ‘성’이라는 두 가지 주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부모’와 ‘성’의 문제가 무의식의 근본적인 층위를 이루는 것처럼, ‘부모’와 ‘성’의 문제는 다종다양한 피해의식의 근본적인 층위에 자리 잡고 있다. 우선 ‘부모’의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한 사람의 피해의식에 ‘부모’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광호’와 ‘강준’은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너 요즘 살찐 거 아니야?” ‘광호’와 ‘강준’ 두 사람이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보자. ‘광호’는 그 말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길 수 있다. 반면 ‘강준’은 그 말에 격앙되어 과민하게 반응한다. 이처럼 피해의식이 덜한 이들이 있고, 피해의식이 더한 이들이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차이는 결과적일 수 있고, 자연적일 수도 있다.
결과적 차이는 무엇일까?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사회적 성취‧긍정적 태도‧자기성찰…)으로 인해서 피해의식의 밀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즉, ‘강준’보다 ‘광호’가 자신의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피해의식이 덜해질 수 있다. 하지만 피해의식의 밀도는 그런 결과적 차이로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차이로도 달라질 수 있다. 즉,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이 덜할 수도 있다.
그 자연적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광호’와 ‘강준’은 뚱뚱하다고 놀림받은 일들이 비슷하게 있었다. 또한 둘 모두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 딱히 고민하거나 성찰해본 적도 없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둘의 피해의식의 밀도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부모’의 차이 때문이다.
‘부모’라는 근본적 피해의식
“또 먹어? 살 좀 빼!” ‘강준’의 부모의 입버릇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강준’의 부모는 ‘강준’의 외모를 긍정해주지 않았다. 반면 ‘광호’의 부모는 달랐다. ‘광호’의 부모는 ‘광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광호’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피해의식의 자연적 차이는 대부분 ‘부모’로부터 온다. 부모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긍정)받았던 아이는 피해의식이 옅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부모에게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긍정)받지 못했던 아이는 피해의식이 짙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부모’는 반드시 생물학적 부모일 필요는 없다. 한 아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면 된다. (이를 정신분석학에서는 ‘대타자’라고 한다.)
‘부모’의 중요성은 다른 피해의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늘 억울하게 비난(오해)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누군가 옆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면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는 분명 어린 시절 근거 없는 비난이나 오해를 받은 경험(상처) 때문에 발생한 피해의식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런 억울한 비난이나 오해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비난(오해)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하고 누군가는 덜하다. 이 역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부모’라는 원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억울한 비난이나 오해(상처)를 받아도 비교적 쉽게 넘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오해하더라도, 부모만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거나 혹은 조건부 사랑만 받았던 이들은 억울한 비난과 오해를 쉽게 견뎌내기 어렵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믿는 아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피해의식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에서 ‘부모’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고, 무의식에서 ‘부모’라는 항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크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그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기억은 한 사람의 삶 전반을 지배한다. 한 사람의 무의식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부모의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듯, 한 사람의 피해의식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도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