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은 무엇인가?
베르그손을 흔히 반反지성주의자라고 합니다. 의아한 표현이죠. 철학자는 누구보다 지성적인 이들 아닌가요? 그런 철학자들 중에서도 탁월한 지성을 보여준 이가 바로 베르그손입니다. 그런 이가 ‘지성’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베르그손은 지식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상대적 지식과 절대적 지식입니다. 상대적 지식은 무엇일까요? 어떤 대상을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 파악한 지식이에요. 반면 절대적 지식은 어떤 대상 그 자체를 온전히 파악한 지식이에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비교, 분류하고 분석하는 ‘지성’은 상대적 지식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고, 절대적인 지식은 오직 ‘지속’하는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직관'은 어떤 것일까요?
직관은 무엇보다도 내적 지속과 관련된 것이다. 직관은 몇 가지 대상을 비교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어떤 현상이 잇따라 일어나는 사태 자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사유와 운동』 앙리 베르그손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우리는 그 사람을 알고 싶죠. 이때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지성’(상대적 지식)과 ‘직관’(절대적 지식)입니다. ‘지성’은 비교‧분류‧분석하는 일이죠. “이전 연인에 비해 키가 크고(비교), MBTI는 ‘ESFJ’형(분류)이니까, 이 사람은 외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겠다.(분석)” 이처럼, 그 사람을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죠. 하지만 이는 그 사람의 상대적 지식일 뿐이죠. 달리 말해,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자체(절대적 지식)에 대해서 온전히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직관’입니다. ‘직관’은 ‘지속’ 속에서 그 사람을 보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의 미세한 표정 변화, 비가 오는 날에 조금 달라진 목소리, 손을 잡았을 때 미세한 떨림 등등. 그 사람과 함께 하며 그 사람에게 잇따라 일어나는 사태를 ‘지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죠.
'지성'보다 '직관!'
베르그손은 철학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직관’에서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왜 그럴까요? ‘지성’이 비교‧분류‧분석할 수 있는 이유는 고정된 시간·공간과 관계하기 때문이죠. 한 사람을 키와 몸무게, 혹은 MBTI를 통해 파악하는 것은 정신 속에 특정한 시간·공간을 상정해 놓고 비교‧분류‧분석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한 사람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언제나 변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성’은 공간을 분할하고 시간을 고정하기 때문에 진화 혹은 변화되어 가는 상황(생성:becoming)을 볼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늘 생성되는 과정속에 있는 세계는 오직 ‘직관’으로서만 파악 가능합니다.
베르그손은 “지성은 자연이나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난해한 말 역시 이제 이해할 수 있죠. 많이 공부(지성)하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은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자연 안에서 별도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든 그렇지 않든) 반드시 어떤 연결고리를 통해서 다 연결되어 있어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속’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 교육이 만들어 낸 ‘지성’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몇 가지 대상들을 비교하고 그것을 토대로 분류하고 분석하죠. 우리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포착하나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고 분절시키죠. ‘지성’적인 인간들이 제일 잘하는 건 ‘분석’이죠. ‘Analysis’는 다 쪼갠다는 뜻이에요. 이런 비교·분류·분석으로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계(자연) 그 자체를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MBTI로 한 사람을 알 수 있을까?
MBTI로 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더 정교하고 세련된 분석 틀이 나오면 가능할까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정밀하게 분석하는 틀 중 하나가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정신분석학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마음(무의식)을 비교·분류·분석해서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지만 끝에 가면 이상해집니다.
인간을 조각내서 비교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는 있는 그대로 인간을 이해할 수 없어요.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통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예컨대, 한 사람을 ‘강박증’과 ‘히스테리증’로 구분하는 것이 지혜로운 건가요? 세상에 히스테리적이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고, 강박적이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을 조금 공부한 이들은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저 사람은 정신병일까? 신경증일까? 도착증일까?” “신경증이라면, 강박증일까 히스테리일까? 공포증일까?”라고 분석하려고 합니다. 이건 틀을 정해 놓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잘라 내서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방식이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베르그손이 '지성'을 반대한 이유
자연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책’이라고 본다면 여러분들은 ‘지성’적인 인간인 거예요. ‘책’, ‘물병’에서도 ‘세계’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해요.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책’을 ‘책’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책’과 ‘책이 아닌 것’으로 구분했기 때문이에요. 베르그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책에서도 끊임없이 떨리고 있는 분자, 원자, 원자핵, 중성자 단위, 쿼크 단위까지 볼 수 있어야 해요.
베르그손은 비교·분류·분석하는 ‘지성’적 작업으로는 한 사람도 세계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이것이 베그르손이 반지성주의자인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성주의로는 베르그손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세계를 ‘직관’으로 본다는 것은 ‘지속’을 본다는 거예요. 우리가 ‘책’을 볼 때 인식과 인지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 ‘책’이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기랑 만나 산화되며 계속 떨리고 있는 상태에요.
우리는 언제 이 차이를 눈으로 볼 수 있나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책’을 찍고, 100년 후에 그 ‘책’을 다시 찍어서 비교해 볼 때이겠죠. 그 100년 사이에 책이 닳고 색깔이 바래진 그 급격한 차이를 통해서만 책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을 테죠. 이는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 때문에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 책은 매분, 매초, 조금씩 계속 변화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직관’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이런 ‘지속’되고 있는 세계를 본다는 의미에요. ‘직관’은 시간에 관계해요. 정확히는 ‘지속’에 관계하죠. '직관'이란 흘러가는 시간(지속) 개념을 통해 이 세계를 파악하는 거예요. ‘공간화된 시간’에서 벗어나 진정한 시간, ‘지속’을 통해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때, ‘직관’이 발휘되는 것이죠. 만약 우리의 ‘직관’이 아주 섬세해진다면, 어제의 책(너)과 오늘의 책(너), 혹은 1시간 전의 책(너)과 지금의 책(너)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