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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像, image)

 ‘상’, ‘사물’과 ‘표상’ 사이

 『물질과 기억』 1장부터 4장까지 ‘상’이라는 표현이 계속 나와요. 『물질과 기억』을 읽기 위해서는 이 ‘상’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물질은 (image)’의 총화이다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이란 관념론자들이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강하지만 실재론자들이 사물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약한 어떤 존재 -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도에 위치한 존재 – 뜻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상image’은 ‘사물object’과 ‘표상represent’ 사이에 위치한 중도적인 것이에요. 그러니 먼저 ‘사물’과 ‘표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해봐요. 이때 ‘사물’은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만질 수 있는 대상object, 즉 물질적인 사과에요. ‘표상’은 무엇일까요? ‘표상’은 ‘representation’을 번역한 말이에요. 이는 지금present을 다시re 떠올린다는 의미에요. 쉽게 말해, 눈을 감고 사과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거예요. 내 눈앞에 있는present 사과를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리는 것represent, 그것이 ‘표상’이에요.     


 이것이 ‘represent’가 ‘표상하다’는 의미 말고도 ‘재현하다’ ‘대표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 이유에요.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대표하는 것은 언젠가 현재에 있었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대표적인 표상의 도구죠. 영화는 언제가 있었던 ‘지금’을 촬영해서 스크린에서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일이니까요. 쉽게 말해, 표상한다는 말은 생각(상상)한다는 의미에요. ‘비행기’란 말을 듣고 ‘✈’를 떠올린다거나, 반대로 ‘✐’을 보고 ‘연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표상’이에요.            



'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상image’은 무엇일까요? ‘사물’과 ‘표상’ 그 사이에 있는 거예요. ‘표상’은 관념론이죠. 사과(물질)를 상상한 것은 관념이죠. 이는 인간의 정신에 있죠. 그래서 무규정적이죠. 한 인간의 정신 속의 사과, 즉 사람마다 혹은 상황마다 떠올려진 사과의 ‘표상’은 매번 다를 테니까요. 반면 ‘사물’은 실재론입니다. ‘사물’은 물질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는 규정적이죠. 사과라는 ‘사물’은 빨갛거나 푸르고, 단맛이 나고, 나무에서 열리는 등등으로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으니까요.     


 베르그손은 관념론도, 실재론도 모두 틀렸다고 말합니다. 관념론도, 실재론도 다 과도한 논의라는 거예요. 사과라는 ‘대상’은 없고 사과의 ‘표상’만 있다는 관념론도 틀렸고, 사과의 ‘표상’은 없고 ‘대상’으로서의 사과만 있다는 실재론도 틀렸어요. 그렇다면 진짜 사과는 무엇일까요? 사과는 떨림(진동)으로서만, 즉, ‘상’으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실제 사과는 무엇일까요? 우리 머릿속에 있는 ‘사과’인가요? 아니면 내 눈앞에 있는 ‘사과’인가요? 둘 다 모두 진짜 ‘사과’가 아니에요. 삶의 진실로서 실제 ‘사과’는 ‘상’이에요.      


 ‘상’은 무엇일까요? 베르그손은 ‘진동’이라고 해요. 실제 사과가 어디 있나요? ‘표상’으로서의 사과는 우리 머릿속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서의 사과, 즉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동그란 테두리를 가진 사과는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죠. 사과는 원자 단위에서 계속 떨리고 있는 거예요. 주변의 조건(산소·수소·탄소…)에 의해서 아주 미세하게 변화(진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 때문에 고정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에요.      


 머릿속에 있는 사과(표상)도 진짜 사과가 아니고,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빨간색 사과(사물)도 진짜 사과가 아니에요. 둘 다 삶의 진실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떨리며 외부와 반응하고 있는 그 사과라는 ‘상’, 그것이 진짜 사과인 거죠. 세상 모든 존재들은 모두 ‘상’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삶의 진실로서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은 미세한 떨림(진동)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모든 물체들은 양성자·중성자나 쿼크 단위까지 가면 모두 진동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디지털 대전환과 ‘상’


 ‘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일반이며, 그것은 진동입니다. 그런 ‘상’은 감각(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감각 능력으로는 ‘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만약 인간이 ‘상’을 경험하려면 미시 세계를 구성하는 쿼크(원자 단위를 구성하는 소립자) 단위까지 볼 수 있어야 할 거예요.      


 사과든, 자동차든 꽃이든,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다 쪼개서 쿼크 단위까지 들어가면 모든 것이 파동이나 진동의 형태로 존재해요. 즉, 세계는 다 진동이에요.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디지털 대전환이 어떻게 가능해졌을까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정보는 인터넷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죠. 단 몇 초 만에 지구 반대편까지 소리, 이미지, 영상 등을 다 주고받을 수 있어요.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가능하게 됐을까요? 예전에 아날로그로 존재하던 정보를 거의 대부분 디지털화했기 때문이죠. 디지털이 뭔가요? 0과 1로 만드는 진동의 파형이에요. 아무리 복잡한 정보라 할지라도, 0과 1이라는 두 개의 항이 떨어졌다 붙었다, 내려갔다 올라가는 진동으로 환원될 수 있죠. 바로 이것이 아무리 복잡한 정보라도,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까지 전달할 수 있는 이유죠. 아직 미각이나 촉각적 정보는 전송이 불가능하지만 결국엔 그것도 가능하게 될 거에요. 이것이 베르그손의 철학의 현실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세계가 전부 진동, 파형이기 때문에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고정된 ‘물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다 진동이고, 파형이에요. 테두리가 어디 있나요? 근대적 지성(수학·과학·생물학·의학…)이 어떤 대상을 분류·비교·분석하기 위해 테두리가 있는 것일 뿐이에요. 어디까지가 테두리라고 말할 수 없어요. 고체화된 세계에 익숙해져서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세계는 진동과 파형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고정)화시켜서 볼 뿐이에요. 고체화된 대상은 ‘상’(진동)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 인간의 시각이 적응한 결과인 셈이죠.


미신과 ‘상’

 지금부터 이야기는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니 받아들이실 분들만 들으시면 돼요. 여러분들 점 보러 가시죠? 점이 진짜 미신일까요? 그러기엔 진짜로 잘 맞추는 점쟁이들이 분명히 있어요.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확률로 맞추는 사람들이 있죠.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나 무속신앙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베르그손 철학을 이해하면 이를 철학적으로 충분히 해명할 수 있어요.   

   

 세계는 전부 진동, 파형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죠. 진동, 파형은 일종의 주파수에요. 한 사람이 특정 영역에서 극도로 민감해지게 되면 주파수(진동·파형)로 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게 돼요. “저 사람도 좀 이상하다.” 혹은 “저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었고, 앞으로도 또 문제가 생길 거 같다.” 이런 직감(직관)이 특정한 형상으로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타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는 우리는 가청 주파수의 영역만 들을 수 있지만 누군가가 청각이 극도로 민감하다면, 가청 주파수 이외의 영역조차 들을 수 있게 되는 것과 유사할 겁니다. 마치 박쥐가 초음파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는 전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죠. 지극히 ‘자연’적인 거예요. 한 사람의 진동(주파수)은 경향성을 가져요. 그리고 유능한(?) 점쟁이는 그 경향성을 맞추고 읽어내는 걸 거예요.      


 문학 하시는 분들은 종종 시인을 예언자적 존재라고 말해요. 철학자들 역시 이런 예언자적 역할을 할 때가 있어요. 이는 단순한 과장이거나 지나친 비유가 아닐 겁니다. 19세기의 칼 맑스는 ‘자본론’을 통해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지금의 자본주의 상황을 이미 너무도 정확히 예언하지 않았나요?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할 때, 이미 지금의 이스라엘이 만든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옥도를 예언한 것 아닌가요? 이는 다른 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 가버리는 미세한 ‘진동(주파수)’을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극도로 섬세한 정신으로 포착해 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는 시인이나 철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랑도 많이 하고, 진지하게 공부하고, 아파하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기묘한 직감 같은 게 생겨요. “저 사람 앞으로 험난한 삶이 펼쳐지겠다.” 그럼 몇 년 뒤에 그 사람 만나면 그렇게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사실, 과거 미신으로 치부되었던 것들이 현재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들이 얼마나 많나요? 양자 역학도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전까지 미신의 영역에 있었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것들이 이제 전부 다 과학의 영역으로 환원되잖아요. 그래서 종교나 미신 혹은 무속신앙 같은 부분들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속신앙도, 디지털 대혁명도 세상은 모두 ‘진동’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상과 물질, 표상과 지각    

 

 이제 ‘상’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베르그손의 주요 개념인 ‘물질’, ‘표상’, ‘지각’에 대해서 정리해 봅시다. 먼저 ‘상’은 진동인 동시에 존재자 일반Everything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떨림이나 진동이라고 생각하거나 존재자 일반, 둘 중 하나로 문맥에 맞춰서 이해하시면 돼요.


 이제 ‘상’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볼게요. 큰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크게 틀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상’이죠. 소리가 그 자체가 ‘상(진동!)’이예요. 그런데 그 스피커 앞에 물을 두었을 때 그 소리가 내는 진동, 파형, 주파수로 인해 물결이 생기겠죠. 그 물결을 ‘물질’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물질’은 ‘상’들이 만들어내는 잠정적인 형상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즉, ‘물질’은 ‘상’들의 총체이자 총화인 거죠. 소리라는 ‘상’과 물이라는 ‘상’과 공기(매질)라는 ‘상’이 있겠죠? 이 세 가지 상이 다 총화되어서 물결(물질)이 생기잖아요. 물결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은 여러 가지 ‘상’들이 총체화되어 발생한 형상, 즉 ‘물질’이에요. 우리가 ‘물질’이라고 말하는 모든 물질은 다 ‘상’들의 총체예요.      


 이제 ‘표상’과 ‘지각’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할 수 있어요. ‘표상’은 ‘물질’과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고도 형성될 수 있는 관념이에요. 예를 들어, 하늘에서 물결이 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겠죠. ‘물질’계 안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상상해 볼 수 있잖아요. 물에서 물결이 치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물이 둥둥 떠다니면서 물결이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잖아요. 그것이 ‘표상’이에요.      


 그렇다면 ‘지각’은 무엇일까요? ‘상’과 가능한 행동으로 관계 맺는 거예요. 다시 스피커로 예를 들어 볼게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진동)이 ‘상’이라고 했죠. 그 소리를 듣는 내 몸도 진동(심박수), 즉 ‘상’이잖아요. ‘상(음악)’과 ‘상(몸)’이 결합했을 때 특정 관계를 맺을 수 있겠죠. 하나의 ‘상’과 하나의 ‘상’이 결합할 때, 한쪽 ‘상’이 우리의 몸인 경우, ‘지각’이 되는 거죠. 스피커 앞에 섰을 때, 내 몸이라는 ‘상’과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상’이 결합하게 되죠. 그때 우리가 ‘음악을 듣는다’라는 가능한 행동으로 관계 맺게 될 때가 있죠. 그것을 ‘지각’이라는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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