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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물질은 운동이다.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 역시 주요 개념 중 하나입니다. 베르그손은 ‘물질’은 ‘운동’이라고 말해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 즉 특정한 형태를 갖춘 존재(돌·물·꽃·나무…)은 없습니다. 오직 ‘운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우리가 ‘물질’이라고 믿고 있는 존재들은 모두 ‘운동’인 셈입니다. 이는 베르그손만의 독특한 철학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떠한 물체(물질)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두 다 끊임없이 ‘운동’ 중인 상태일 뿐이죠. 우리는 책을 물체(물질)로 지각할 수 있죠. 이는 책이 고정된 물체(물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물질’은 ‘운동이며, ‘운동’ 그 자체가 바로 ‘물질’입니다. 이 난해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책은 정말 고정된 ‘물질’인가요? 그렇지 않죠. 책은 원자 단위로, 그것은 다시 핵과 전자 단위로, 그 핵을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 단위로, 그것은 다시 쿼크 단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리고 이는 모두 떨리고 있는 어떤 ‘운동’ 상태죠. 즉, 책은 ‘물질’이 아니라 ‘진동’(운동)입니다. 그 ‘진동’이 (인간 지각 능력의 한계로) 우리에게 책이라는 ‘물질’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고정된 ‘물체’는 ‘운동’의 착시 효과인 셈이죠.       


        

지성주의의 맹점

 있는 그대의 세계를 잘 들여다봐요. 고정된(고체화된) ‘물질’은 없어요. ‘운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운동’(움직임 혹은 떨림)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누군가를 찍은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는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사진은 운동하는 대상을 고정시켜서 보는 거잖아요. 실제로 그 사람은 사진하고는 다르죠. 계속 떨리고(호흡) 움직이고(이동) 있잖아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물체’는 고정된 사진이고, 베르그손이 말하는 ‘물질’은 움직이는 그 사람입니다.     


 여기서 ‘지성주의’의 맹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교‧분류‧분석하는 근대 ‘지성주의’는 유용함과 유해함을 동시에 갖고 있죠. ‘지성주의’는 멀쩡하게 ‘운동’(움직임 혹은 떨림)하고 있는 대상들을 사진처럼 고정시켰죠.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겁니다. 어떤 대상을 비교‧분류‧분석하려면, 그 대상은 반드시 고정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움직이는 대상을 비교하고, 분류하고,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물론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대상을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죠. 더 세밀하게 비교‧분류‧분석할 때 특정 대상을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사진기(지성주의)의 발명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편하게(분명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는 더 어려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진동, 있는 그대로의 세계


 ‘물질’은 우리가 말하는 고정적이고 고체화된 ‘물질’(꽃‧책‧컵‧개‧인간…)이 아니에요. 그 모든 ‘물질’은 떨리고 있는 상태 그 자체에요. 그래서 ‘직관’이 중요한 거예요. ‘직관’은 ‘지속’을 파악할 수 있는 역량이죠.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생성)를 보려면 공간을 지각하는 ‘지성’이 아닌, ‘지속(시간)’을 지각하는 ‘직관’이 필요하죠. ‘운동(진동)’은 ‘공간’이 아니라 오직 ‘시간(지속)’에서만 파악되니까요.     


 이 ‘직관’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게 됩니다. 흔히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생명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다면 베르그손이 본 세계에서는 모든 ‘물질’이 다 ‘운동’(움직임)이기 때문에 모든 물질을 다 ‘생명’이라고 보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운동’(움직임)은 생명의 특권이 아니에요.    

  

 돌멩이(비생명체)도 움직여요. ‘물질’을 다 쪼개면 양성자, 중성자, 쿼크 단위까지 가잖아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 근본 물질(양성자·중성자·쿼크)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으로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근본 ‘물질’의 조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독특한 운동으로 돌멩이도 되고 인간도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구분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요?      


 ‘운동(진동)’ 양상으로 구분됩니다. 비생명의 운동은 일정한 운동(진동)이고, 생명의 운동은 역동적인 운동(진동)이에요. 바로 그 운동(진동)의 파동 차이가 생명과 비생명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거죠. 돌맹이도 그 내부적 진동(미립자의 운동)이 있고, 인간도 내부적 진동(심박수)이 있어요. 다만, 돌멩이의 진동은 일정한 파형을 가지고, 인간의 진동은 역동적인 파형을 가질 뿐인 거죠.      


 운동(움직임)을 생명체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에요. 움직임의 범위를 인간적으로 보는 거예요.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임이 생명의 특권처럼 혹은 중요한 특징처럼 보는 건 지각의 한계로 인해 발생한 오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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