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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세계가 온다는 것

‘상’, 실재론과 관념론 넘어

 1장부터 시작해 볼게요. 『물질과 기억』 1장의 제목이 “표상을 위한 상들의 선택에 관하여”에요. 이 장은 기본적으로 몸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어요. 즉,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의 몸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어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봅시다.

     

 잠시 물질에 대한 이론들도 정신에 대한 이론들도또 외부의 세계의 실재성(réalité)이나 관념성(idéalité)에 대한 논의들도 모두 모르는 체하려고 한다그러면 이제 나는 그 말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상(image)들 앞에즉 내 감각을 열면 지각되고 닫으면 지각되지 않는 상들 앞에 있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실재론과 관념론을 모두 비판해요. 즉 내 지각과 아무 상관 없이 존재하는 실제적 존재가 있다는 견해(실재론)도, 반대로 세상에 실제적 존재는 없고 오직 우리가 지각해서 생긴 관념적인 것만 있다는 견해(관념론)도 모두 삶의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요. 실제로 있는 것은 ‘실재’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에 있는 ‘상’뿐이라는 거죠. 


 꽃을 예로 들어 봅시다. ‘실재’적인 꽃이 있고, ‘관념’적인 꽃이 있죠. 실재적인 꽃은 물질적이기에 완전히 고정된 꽃이고, ‘관념’적인 꽃은 정신 속에만 있기에 완전히 유동적인 꽃이죠. 왜냐하면 물질적인 꽃은 어떤 관찰자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을 테고, 정신적인 꽃은 관찰자마다 완전히 다른 형태로 표상될 테니까요. 이 두 꽃은 모두 진짜 꽃이 아니죠. 진짜 꽃은 그 두 꽃 사이에 존재하는 ‘상’으로서의 꽃인 거죠.  


   

‘몸’이라는 ‘상’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상황이 있죠. 그 ‘상’으로서 꽃은 어떻게 지각되냐는 거죠. 그것은 “내 감각이 열면 지각되고 닫으면 지각이 되지 않는 상들 앞”에서 지각되겠죠. 그 ‘상’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상’은, 우리 ‘몸’이라는 ‘상’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이죠. 즉 ‘지각’이라는 것은 ‘상’(세계)과 ‘상’(몸)의 마주침인 셈인 거죠. 그래서 몸이 중요한 겁니다. 세계(대상)라는 ‘상’은 오직 몸이라는 ‘상’에 의해서 지각되니까요.      


 지각에 의해 밖으로부터 인식될 뿐 아니라 느낌affection에 의해 안으로부터 인식된다는 점에서 다른 것보다 두드러진 상이 하나 있다내 몸corps이 그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 전체가 ‘상’이라고 했을 때, 베르그손은 ‘몸’이라는 ‘상’에 주목해서 이야기하려 해요. 우리의 ‘몸’이라는 ‘상’은 독특하죠. 이 ‘상’은 외부로 나가는 동시에 내부로 들오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가 터지는 걸 목격했어요. 바깥에 있는 그 현장을 보고 ‘지각perception’하죠. 그게 끝일까요? 아니에요. 내부에서 다시 ‘무섭다’ ‘징그럽다’라고 하는 ‘감정affection’이 반드시 일어나잖아요.      


 ‘몸’이라는 신체 기관은 양방향으로 동시에 작용하는 ‘상’이에요. 밖에서 안으로 외부의 것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안쪽에서 바깥으로 감정 혹은 정조로서 내보내기도 하죠, 이것이 스피노자 말한 ‘신체의 변용(변화)’이잖아요. 어떤 자극을 받으면 표정이 변하거나 소름 돋고 그러잖아요. 누군가 갑자기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면(자극을 받으면) ‘어? 칼이 들어왔네?’라며 외부 대상을 ‘지각’만하고 끝인가요?


      

몸, ‘지각’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는 ‘상’


 절대 그렇지 않죠. ‘지각’하는 순간 신체가 변용되죠. 즉, 내부에서 정조 혹은 ‘감정’이 발생하게 되죠. 이것이 세계의 ‘상’들에 비해 ‘몸’이라는 ‘상’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이에요. 컵이나 돌멩이 같은 ‘상’들은 이런 동시적 양방향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죠. 그런 ‘상’들은 외부로 나가 우리에게 ‘지각’되기만 할 뿐이죠. 우리가 컵이나 돌멩이를 보거나 쥔다고 그 컵이나 돌멩이 내부에서 어떤 정조나 감정이 촉발되지 않잖아요.    

  

 내가 느끼고 본 것을 간단·순수하게 다음과 같이 정식화定式化하려 한다내가 우주라 부르는 상들의 총체 속에서는 내 몸이 내게 그 유형을 제공하는 어떤 특별한 상들의 매개에 의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에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세계(우주) 전체가 ‘상’들의 총체라고 말해요.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세계 전체는 ‘상’들의 총체라는 거죠.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세계에는 두 가지 ‘상’이 있는 셈이에요. 우리가 세계(우주)라고 부르는 삼라만상의 ‘상(진동·파동·주파수)’들이 있죠. 또 그 거대한 ‘상’들을 지각하는 우리의 ‘몸’이라는 ‘상(진동·파동·심박수)’이 있는 거죠. 세계(우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이기에 그 ‘상’을 지각할 ‘몸’이라는 ‘상’이 없다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표상’(생각‧상상)한다는 것은 우주라는 ‘상’과 몸이라는 ‘상’이 만났을 때 발생하게 되는 거예요. 즉, ‘표상=우주(상)+몸(상)’이라는 거죠. 컵이 없을 때도 우리는 컵을 표상할 수 있죠. 이는 언젠가 우주 속에 있었던 컵이라는 ‘상’과 우리의 몸이라는 ‘상’이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거잖아요. 컵이 우리에게 지각되었을 때의 ‘상(진동·파동·주파수)’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컵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컵을 ‘표상’할 수 있는 것이죠.


      

한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세계가 온다는 것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런 ‘상’들의 특별한 매개에 의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이 일어날 수 없어요.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죠.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황금산’을 ‘표상’할 수 있죠. 그것은 세계(우주) 속에 있는 ‘황금’이라는 ‘상’과 ‘산’이라는 ‘상’을 우리의 ‘몸’이라는 ‘상’이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새로운 어떤 것(황금산)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집 안에 혼자 있으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어요. 창작자나 예술가들은 왜 새로운 곳으로 여행 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려고 할까요?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 그 외부 ‘상’들을 통해 자신 안에 무언가(상!)가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다고 해봐요. ‘아, 자연은 정말 아름답구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성들이 떠오르죠. 그 감성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음악‧그림‧글…)들이 촉발될 수 있어요. 즉, 내 몸과 매개되는 ‘상’들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나요? 하나의 ‘상’ 안에는 이미 세계가 매개되어 있다는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새로운 음악, 그림, 글이 떠올랐다면, 나이아가라 폭포(상) 안에 이미 그 모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는 비단 특정한 창작자나 고결한 예술가들만 겪는 일이 아니에요. 일상을 사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베르그손의 철학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놓치고 사는 삶의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세계 전체가 온다는 것.’ 여러분이 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상’(사랑!)을 가질 때, 그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큰 키‧ 하얀 손‧짧은 머리…)만 가지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경험했었던 수많은 ‘상’들 역시 함께 오는 거예요.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정말 그 사람이라는 ‘상’을 포착하는 것으로 끝나 나요? 그렇다고 답하는 분들은 사랑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거나 거래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분들일 겁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세계가 밀려 들어와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사람, 음식, 영화, 음악, 도시, 색깔, 향기 등등 그 사람이 경험했던 거대한 세계 전체가 밀려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매혹적인 일인 동시에 또 위험하며 고된 일이기도 한 거죠. 사랑은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어느 매혹적인 도시 전체를 여행하는 일과 같을 겁니다. 하나의 ‘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계 전체와 매개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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