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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미루는 것이다.

 ‘몸’이라는 ‘상'

 베르그손은 ‘상’ 개념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몸’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세계 전체가 ‘상’이니 그 세계 속 존재하는 우리의 ‘몸’ 역시 하나 상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몸’이라는 ‘상’은 다른 ‘상’들과 다른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봅시다.     


내가 내 몸이라 부르는 이 특별한 상의 윤곽configuration을 탐구한다나는 우선 진동들을 신경중추에 전달하는 구심신경들다음으로는 중추로부터 출발하여 주변으로 진동을 전달하고 몸의 부분 또는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원심신경을 만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먼저 ‘진동’이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우리 몸이 무엇인가를 감각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진동을 통해서예요. 시각을 예로 들어 볼까요?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볼 수 있죠. 이는 사과에 반사된 빛이 망막을 통해 들어옵니다. 이는 일종의 전기적 신호로 전환되어 우리의 시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과를 시각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이죠.      


 촉각과 청각도 마찬가지죠. 사과를 만질 때 촉감을 느끼게 되죠. 이는 사과와 접촉한 피부의 온도, 압력 등이 일종의 전기적 신호로 전환되어 신경세포를 타고 뇌로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음악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죠. 음악 소리가 일종의 전기적 신호로 전환되어 신경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우리의 모든 감각은 모두 전기적 신호를 통해서 가능해요. 그런데 이 전기적 신호가 바로 ‘진동’입니다. 전기적 신호의 단위는 헤르츠(Hz)잖아요. 헤르츠가 뭔가요? 단위 시간당 진동수를 의미하잖아요.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를 감각한다는 것은 외부의 ‘상’(사과‧음악…)이 특정한 진동으로 변환되어 우리네 신경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된다는 거예요. 이를 통해 우리는 ‘구심신경’과 ‘원심신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심신경과 원심신경

 ‘구심신경’은 무엇일까요? 이는 유입신경, 즉 특정한 진동을 밖에서 안으로 유입되게 하는 감각신경입니다. 우리 몸(귀·눈·코)이 받아들인 자극(진동)이 중추신경을 지나서 뇌까지 전달되는 과정(외부→내부)을 담당하는 신경이 ‘구심신경입’니다. ‘원심신경’은 ‘구심신경’과 반대로 작용하는 유출신경이에요. 즉, 뇌를 포함한 중추신경계에서 시작해서 몸의 말단 부분(손‧발‧얼굴…)으로 신호를 보내 근육을 움직이는 거예요.    

 

 심리학자들과 생리학자들에게 그들 각각의 목적지destination를 물어본다그들은 신경계의 원심운동이 신체 혹은 그 일부를 움직이게 하고신경계의 구심운동 혹은 구심운동에 관계한 어떤 것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표상을 생겨나게 한다고 대답한다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구심신경과 원심신경의 목적이 무엇인가?’ 베르그손이 심리학자와 생리학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구심신경(유입신경)은 신체 말단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받아들여 뇌로 특정한 표상(이미지)를 생겨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답할 겁니다. 반대로 원심신경(유출신경)은 뇌에서 신체 각 부분으로 특정한 명령을 전달해서 신체 혹은 그 일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답할 겁니다.


 이는 비단 심리학자나 생리학자만의 견해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심신경을 통해 세계를 지각(표상)하고, 원심신경을 통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구심신경(눈→뇌)을 통해 ‘지금 여기에 빨간 사과가 있다’는 것을 지각(표상)할 수 있다고 여기죠. 또한 원심신경(뇌→손)을 통해 손으로 사과를 반으로 쪼갤 수 있다고 여기죠. 하지만 놀랍게도, 베르그손은 이런 생각은 모두 오류라고 말합니다.


     

지각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흔히 우리는 구심운동(눈·코·입→뇌)을 통해서 특정한 대상을 지각(표상)한다고 믿습니다. 지각(표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볼까요?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과의 표상(지각)은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요? 사과를 손(피부)으로 만지고, 그 피부 안쪽의 근육 즉 구심성 뉴런을 통해 받아들인 자극을 척수와 뇌에 전달하여 머릿속에 사과를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각(표상)은 구심운동(손·눈·코·입→뇌)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외부 대상(사과)으로부터 신체 일부가 자극받아 구심신경 통해 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다시 원심신경을 통해 뇌가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총체적인 과정 자체로 사과를 표상(지각)하게 되는 거예요. 즉, 외부 대상(사과)을 수용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외부 대상(사과)에 대해 영향을 미치면서 지각(표상)이 형성되는 거예요. 이는 낯선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나는 외부 상들이 내가 내 몸이라 부르는 상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안다전자는 후자에게 운동을 전달한다그리고 나의 몸이 외부 상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잘 안다전자는 후자에게 운동을 되돌려준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의 논의는 난해합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외부 상”을 ‘뱀’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어두운 상자 안에 있는 어떤 물체를 잡았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때 우리는 구심신경(손·눈→뇌)을 통해 그것이 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즉, “뱀이네.”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지각(표상)일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구심신경을 통해 뱀을 확인하는 순간, 원심신경(뇌→손)이 작동하게 됩니다. 즉, “으악!” 외치면서 바로 놓아버리게 될 겁니다.      


 뱀은 우리의 몸에게 운동을 전달하죠. 뱀이 가진 진동과 떨림, 그 촉감과 움직임이 내 몸에 전달되죠. 동시에 나의 몸이 외부의 상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죠. 뱀을 만졌을 때 집어 던지거나 아니면 더 꽉 잡아서 목을 조르는 등 나의 몸이 외부의 상(뱀)에게도 운동을 되돌려주잖아요. 쉽게 말해, “뱀이네”(구심신경)와 “으악”(원심신경), 이 두 가지 양방향 운동의 총체가 바로 지각(표상)입니다. 이제 베르그손의 난해한 말이 조금 더 잘 이해될 겁니다.      



 지각은 받아들임과 내보냄의 동시 작용으로 이뤄진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물질계의 총체 속에서 운동을 받아들이고 되돌려주면서 다른 상들과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하나의 상이다다만 나의 몸은 아마도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어느 정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의 몸은 물질계 총체 속에서 운동을 받아들이는 구심신경뿐만 아니라, 그 물질계 총체로 운동을 되돌려주는 원심신경으로 작용합니다. 우리의 몸은 세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다른 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 역시 그런 ‘상’인 겁니다. 우리가 지각(표상)한다는 것 역시 그런 상들의 상호작용 작용 아래서만 가능한 것이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표상)한다는 고정된 세계를 일방적으로 수용한다는 게 아니에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 역시 그 세계 일부로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를 지각한다는 거에요.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죠. 사랑하는 ‘너’가 있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그 ‘너’를 어떻게 지각할까요? 항상 고정된 상태로 있는 ‘너’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건가요? 이는 바보 같은 말이죠. 그 ‘너’는 늘 변하는 세계(집·직장·날씨…)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하나의 ‘상’입니다. 우리 역시 그 속에서 흔들리는 ‘상’이죠. ‘너’를 지각한다는 건, ‘너’의 미세한 표정과 호흡을 받아들이고, 그런 ‘너’에게 어떤 표정과 말로 ‘너’에게 영향을 주는 일의 총체입니다.      


 ‘너’를 지각한다는 건 세계라는 ‘상’ 속에 ‘너’와 ‘나’의 상이 작용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너’를 만날 때, 그 사람을 보는 것만이 지각이 아니에요. 수 없이 물결치는 인파 속 저 멀리서 오고 있는 ‘너’를 보고 그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죠. 그 미소를 보고 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때, 비로소 ‘나’는 ‘너’를 지각한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속의 여느 존재들, 비생명체·생명체들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독특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돌멩이와 인간은 무엇이 다르죠? 돌멩이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내보냅니다. 예컨대, 누군가 돌멩이를 발로 차면 돌멩이는 그 충격을 받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돌멩이는 튕겨져 나가죠. 즉, 그 충격을 밖으로 내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우리의 뺨을 때리면 우리는 그 충격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에게 화를 내거나 반격을 하죠. 즉 그 충격을 밖으로 내보내는 겁니다.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 속으로 내보낸다는 측면에서 돌멩이와 인간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멩이와 인간은 차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바로 외부 세계의 수용과 출력 사이의 ‘지연’입니다. 돌멩이는 충격을 수용하는 동시에 출력합니다. 즉, 누군가 돌멩이를 바로 차는 순간 튕겨져 나갑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죠. 인간 역시 충격을 수용하면 반드시 출력하게 되지만, 그 사이를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 우리의 뺨을 때려도 우리는 잠시 멈춰서 그 사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비생명체(돌멩이) 혹은 생명체(개)와 다르게, 특정한 외부 대상(사건)에 대해 지금 반응할지 혹은 나중에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바로 이것이 세계의 여느 존재들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면, “나의 몸은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죠. (베르그손은 이를 ‘응축’이라고 이야기해요. 이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    


 

자유는 수용과 출력의 ‘지연’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자유가 나오는 겁니다. 자유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상태는 부자유한 상태죠. 누군가가 나를 때렸다고 그 즉시 나 역시 상대를 때리는 건 돌멩이와 같은 상태잖아요. 또한 누군가가 나를 때렸다고 그 즉시 상대에게 꼬리를 내리는 건 개와 같은 상태잖아요. 이는 모두 외부 대상의 수용과 출력 사이에 어떤 지연도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하기 싫은 것은 안 하는 것, 혹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 이는 굉장히 부자유한 상태이며. 비인간적인 상태입니다. 그것은 수용과 동시에 출력해 버리는 돌멩이나 개의 상태와 유사할 겁니다. 하기 싫어도 참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다움이고, 하고 싶어도 참고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인간다움입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건 그런 겁니다. 돌멩이와 개는 돌멩이와 개로 존재하다가 소멸하죠. 하지만 인간은 그런 부자유한 존재가 아니죠.      


 인간은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존재로 나아갈 수 있죠.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수용과 입력 사이를 얼마든지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 대상의 수용과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출력 사이를 ‘지연’시킬 때 다른 존재로 나아갈 수 있죠. 우리네 삶이 정말 그렇지 않나요?      


 배고프다고 그 즉시 먹지 않고 참아 낼 때, 화가 난다고 그 즉시 화를 내지 않고 참아 낼 때, 어렵다고 그 즉시 책을 덮어버리지 않고 참아 낼 때, 그 ‘지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외부 대상의 수용과 그로 인한 출력 사이를 지연시켜 다른 존재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자유이며, 그런 자유로운 삶이 인간다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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