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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운동'하는 존재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죠. 여기서 방점은 ‘동물’이 아니라 ‘생각’에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 동물적 속성을 갖지만, 그것으로 인간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고유성은 동물성이 아니라 사유성에 있다고 믿지요. 쉽게 말해,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죠. 아주 긴 시간 동안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과의 차이를 표상(이성·사유) 능력에서 찾곤 했습니다. 이는 서양철학에서도 분명히 확인됩니다.     


 서양의 근대철학 시작을 알렸던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개념을 생각해 볼까요? ‘코기토’가 무엇인가요? 이는 그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의미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서양의 근대철학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아주 당연하게도, 표상(지성·사유·생각) 능력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인간을 바라보는 이런 관점이 터무니없는 의견이라고 말합니다.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몸은 행동의 중심이다.

     

몸은 여러 가지 대상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대상이다따라서 나의 몸은 행동의 중심이며(centre d'action), 그 몸이 표상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나의 몸은 행동의 중심”이며, “그 몸이 표상(생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쉽게 말해,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인간은 ‘표상’(생각)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요. 이는 분명한 삶의 진실이죠.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삶을 들여다볼까요?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본다고 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머릿속으로 사과의 ‘표상’을 떠올리는 것일까요? 즉, 사과 하나를 바라보며 저 사과는 어떤 품종이며, 그 품종의 색깔과 맛은 이러저러하며, 사과는 각각의 품종별로 어떤 특성과 효능이 있는지를 표상(생각·사유·지성)하는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는 사과를 바라보며 근본적으로 먹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행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행동’이 근본적이고, ‘표상’은 부차적입니다. 사과에 대한 ‘표상’, 즉 사과의 품종이나 특성과 효능 등등에 관련된 생각들은 결국 사과를 먹는 ‘행동’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사과’라는 ‘상’을 보고 머릿속에 사과와 관련된 ‘표상’을 떠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시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과를 보는 순간, ‘표상’이 아니라 나의 몸이 ‘행동’의 중심에 서게 되니까요.


표상보다 행동이 근본적이다.  


 베르그손이 『창조적 진화』에서 설명했던 예시를 들어볼게요. 아주 긴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인간) 역시 원생동물(단세포 동물)이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다세포 고등동물인 인간은 근본적으로 단세포 생명인 원생동물로부터 왔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단세포의 원생동물(아메바)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다세포 동물인 고등동물(인간)이 된 것이니까요.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은 단세포 원생동물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겁니다.     


 아메바(원생동물)가 눈앞의 먹이를 보며 어떤 반응을 할까요? ‘작은 유기물 덩어리가 있다’고 표상(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죠. 아주 단순하게, 지금 눈앞에 있는 먹이를 섭취할 건지 아니면 지나칠 것인지를 판단할 뿐이죠. 아메바와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지점이 있습니다. 둘 모두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메바도 인간도 모두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특정한 대상(사건) 앞에서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 ‘행동’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인 거죠.      


 보통 수업하면서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기에 앞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거칠게 구분하곤 해요. 제가 무식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런 설명이 인간의 본성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에요. 인간 역시 아메바처럼 기쁜(유익한) 건 취하고, 슬픈(유해한) 건 취하지 않으려 해요. 우리의 몸은 늘 그런 ‘행동’의 중심에서 서 있는 것입니다.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와 관련해서는 우리 역시 원생동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척수 반응=대뇌 반응

 이른바 뇌가 지닌 지각 능력이라 하는 것과 척수의 반사 기능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질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척수는 받아들여진 자극을 이미 이루어진 운동으로 변형하고 뇌는 그것을 단지 이제 곧 나타내려고 할 뿐인따라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반작용으로 연장한다그러나 이 경우든 저 경우든 신경 물질의 역할은 운동들을 인도하거나서로 결합하거나억제하는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뇌 과학자들은 수의근(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과 불수의근(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근육)을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운동으로 구분해요. 예를 들어, 척수가 관여하는 무릎 반사처럼 대뇌가 개입하지 않는 운동과 대뇌가 개입하는 운동을 구분하죠.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예요. 베르그손의 말처럼, 뇌가 지닌 지각 능력과 척수의 반사 기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질의 차이는 있을 수 없죠.  

    

 척수에서 바로 반응을 일으키는 무조건 반사와 대뇌의 개입이 필요한 조건 반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반응이 아니에요. 그 둘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같은 반응을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봐요. 그 사람에게 다가갈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 시간을 압착 시키면 결국 그 사람 쪽으로 가잖아요. 툭 치면 다리가 순식간에 올라오는 것처럼 반응하는 거예요.    

  

 (척수 반응이 아닌) 대뇌가 개입하는 반응에는 무엇인가 더 복잡하고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죠. 다 거짓말이에요. 대뇌 반응과 척수 반응과 근본적으로 같은 반응이에요. 시간을 두고 반응하느냐 즉각적으로 반응하느냐의 차이만 있는 거예요. 척수 반응이나 대뇌 반응 모두 내 행동의 중심, 즉 ‘몸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인 겁니다. 쉽게 말해, 뇌의 표상을 나의 행동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동물로서 생각하는 존재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이 오래된 정의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몸을 가진 인간은 근본적으로 행동(동물성)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생각’(표상)은 더 잘 ‘행동’하기 위해 진화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표상’ 능력, 즉, 사유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과대 포장하면 안 돼요. 어쩌면 여기서 인간의 거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크고 작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불행해지곤 합니다. 동료들과 작은 마찰이나 혹은 사소한 업무 차질에도 과도하게 걱정하고 불안해하곤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과도한 ‘표상’ 능력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작고 사소한 문제 앞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과도하게 상상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네 삶이 점점 불행해지는 것 아닌가요? 이런 불행을 막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저 몸을 일으켜 힘껏 뛰는 ‘행동’을 하면 됩니다. 그때 크고 작은 걱정과 불안은 눈 녹듯 사라지곤 합니다. 인간은 ‘표상’의 존재가 아니라 ‘행동’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일 때,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몸이 세계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봅시다.  


    

몸의 역할은 무엇인가?

 몸이라고 부르는 상의 역할이 다른 상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다몸은 실질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행동 방식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그리고 그 행동 방식들은 분명 몸이라는 상이 주변의 상들로부터 얼마만 한 이익을 끌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내 몸에게 제안된 것이다그러므로 주위의 상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이 내 몸으로 향하고 있는 앞쪽에 내 몸이 그것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이득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 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우선, 몸(상)은 다른 대상(상)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꽃을 꺾거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의 몸이라는 ‘상’이 꽃, 친구라는 ‘상’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이는 우리의 몸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행동 방식들 가운데 특정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죠.   

   

 즉, 여러 가지 꽃들 가운데 어떤 꽃을 꺾을 건지 결정하고, 많은 친구 가운데 어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지 결정하고 또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건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몸은 실질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행동 방식들 사이에서 특정한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합니다.      



몸은 기쁨을 주는 쪽을 향한다.


 그런데 몸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결정은 내 몸의 가장 큰 이득이 되는 쪽을 향한다는 사실이죠. 이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이득을 줄 대상 앞으로 향하게 돼요. 그래서 직장 상사를 만나면 뒷걸음질 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꾸 그 사람 곁으로 가려고 하는 거죠.      


 직장을 갈 때 어깨가 처지고 연인을 만나러 갈 때 발걸음이 가볍지요. 우리는 이런 일련의 행동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몸이라는 상이 주변의 상들로부터 얼마만 한 이득을 끌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내 몸에 제안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은 자연스럽게 어떤 대상이 내게 기쁨을 줄까, 슬픔을 줄까를 판단해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쪽으로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몸은 외부 대상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원심신경), 동시에 외부 대상들 역시 우리의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구심신경). 우리가 꽃을 꺾을 때 꽃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꽃이 아닌 바로 그 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아름다움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 “주위의 상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 내 몸이 그것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이득(기쁨)을 그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몸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근본적인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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