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은 무명 씨
스스로 옷을 입고 벗기도 하고 혼자서 소변도 본다. 냉장고 문도 열 수 있어 손에 닿는 우유를 꺼내기도 하고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를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혼자 외출도 가능해졌다. 조금 더 커져서였을까. 아기 취향의 상당 기간을 지배했던 동물 사랑도 스멀스멀 약해져 가는 느낌이다.
공주님들의 국적은 다양한데 아쉽게도 대한민국 공주는 없다. K-컬쳐 시대 속 코리아 프린세스의 등장이 절실하다. 아기에게 공주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예뻐서라는 답을 한다. 내 아들이 맞나 보다. 내가 와이프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지금 문장은 와이프를 겨냥하고 쓴 작정하고 문장이지만 정작 와이프는 내 글에 관심은 없다는 사실이 큰 함정이다)
어쩌다 공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를 '내 기준'에서 생각해 보면 공주를 노출시켜 준 '내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기와는 도서관을 자주 가는 편이다. 어렸을 적에는 관심을 보일 만한 큰 그림 위주의 플랩북이 주였다면 요새는 이야기가 있는 전래동화나 고전명작을 찾는다. 그렇게 소개해 준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푼젤 등등의 공주 컬렉션들. 문제는 이 어여쁜 공주들이 아기와 만나게 되면 방귀와 응가와 쉬야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이다.
말도 하루하루 늘어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말장난을 하는 루틴도 생겼는데 이때 아기는 자신이 응가하는 백설공주가 되어 배에 힘을 주는 시늉도 하고 방귀 뀌는 신데렐라가 되어 뿡뿡하며 한참을 떠들다 잠이 든다.(입을 삐쭉 내밀고 흉내를 내는 표정이 너무 귀엽다. 스리슬쩍 커 가는 아기가 아쉬울 뿐이다)
그렇기에 부모란 아기가 자신만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좋은 등대가 되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불 꺼진 침대에 누워 입으로는 응가와 방귀와 쉬야를 하는 공주 친구가 된 채 머릿속으로는 아기가 더 크면 어떤 세계관에 빠질지를 상상해 본다. 대견스러운 등대가 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훌륭한 아빠님.
공주님들은 모두 백설공주, 신데렐라 같은 이름이 있는데 이야기에 등장하는 왕자님들은 왜 하나같이 무명 씨일까. 아하!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병풍 느낌인 것이 아닐까. 유레카다! 결혼 4년 차의 남편은 이야기 속의 왕자님들과 교감을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역시 고전 명작이란 수식어가 괜히 붙는 것이 아니다. 자문자답을 하는 사이 한참을 떠들던 방귀 뀌는 라푼젤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을 잔다. 참 사랑스러운 2025년의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