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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

-칼 융의 꿈의 보상기능(compensatory function)

by 오렌


칼 융은 꿈을 포함한 모든 정신 현상을 정신의 전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따라서 융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꿈은 전체 정신의 실제적 필요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융은 '꿈의 보상기능(compensatory function)'이라고 했다.



1. 의식의 태도가 너무 일방적인 경우, 꿈은 생각지도 못한 정반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의식의 태도가 너무 일방적일 때 전체정신에 대한 균형의 작용으로 꿈은 의식의 태도와 반대로 나타난다. 가령 성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 생면부지의 멋진 이성과 데이트를 하는, 무의식에 억압된 성에너지가 해소되는 꿈을 꿀 수 있다. 여기에 딱 들어맞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각이 난다. 라디오스타에 박중훈 배우가 나와서 절친한 선배 안성기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다. 안성기 배우가 얼마나 가정적이고 좋은 사람인가에 대한 예로 든 이야기인데, 안성기 배우의 꿈에 모르는 여성이 나타나서 유혹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중훈 배우가 특유의 짖꿋은 말투로 '그래서 하셨어요?'라고 했고, 안성기 배우는 '아무리 꿈이라도 그럴 수는 없어서 안 했다'라고 했다. 그러자 박중훈 배우가 '하셨어야죠.'라고 해서 좌중을 웃겼다. 꿈이 주는 보상기능에 딱 맞는 예화다. 안성기 배우가 '아무리 꿈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는 표현은 아내분께서 들으시면 기분은 좋겠지만, 실재로는 박중훈 배우가 한 농담처럼 '하셨어야죠.'가 답이다.

옛날 옛날에 어떤 남자가 자기는 '공중 화장실에서 물을 내릴 때 밸브를 발로 밟지않고 손으로 누른다'면서 자신이 양심적인 사람인듯이 말을 했다. '그거 원래 발로 누르는 건데요?' 남들이 다 발로 밟은 밸브를 힘들게 손으로 누르는 그런 자는 양심적인게 아니라 답답한 사람이다.


현실의 스트레스에 대해 무의식이 주는 보상 까지도 참는 꿈의 모습은 초자아 검열이 과도한 억압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꿈은 현실에서 절대 허용되지 않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인데, 꿈에서 할 수 있고, 해도 되는대도 안 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착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의식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초자아 검열이 과도한 상태, 즉 불균형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융의 꿈의 보상기능에 입각해서 보면 착하다는 것은 균형 잡힌 전체성을 의미한다.


다른 예로 쉬지 않고 과도하게 일만 할 때, 현실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근사한 해외여행을 하는 꿈을 꾸는 경우다. 이럴 때, 진짜 이런 일이 생기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로는 이룰 수 없고, 이러한 꿈을 통해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고 환기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아! 요즘 너무 쉬지 않고 일만 했구나! 휴식이 필요해.'라든가. '너무 쉬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은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조금만 더 집중하자.'라든가. 꿈같은 해외여행은 못 가더라도 틈틈이 산책이라도 하는 계획을 세워 생활의 균형을 잡을 수도 있다. 또, 꿈속의 휴양지에서 낯선 연인과 즐겁게 지낸 느낌으로 잠시나마 릴랙스 되는 실재적인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2. 의식의 태도가 일방적이지는 않지만 다소 불균형할 때, 꿈은 보충(complement)할 수 있는 형태를 제안한다.


이 경우가 내가 꿈을 통해서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현실적인 방향을 잡고 도움을 받는 가장 유용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실 작가의 삶을 살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내 경우는 꿈의 제안이 가장 컸다. 또 다른 연재 브런치 <기승전글> '6화. 작가가 되어야 할 한 가지 이유'에서 이 부분을 쓰려고 하다가 좀 더 맥락상으로 충분히 쓸 수 있을 때 쓰려고 쓰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맥락 없이 '의식적으로는 작가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꿈에서 자꾸 작가가 되라고 해서 작가가 되기로 했다'라고 말하면 글 자체로는 맞는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줏대 없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장서로 빼곡한 서재가 있는 환경에서 책에 파묻혀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꿈을 꾸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이도 있고,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게 되었고, 그때부터 미친 듯이 글을 썼다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듯이 작가의 삶을 살게 된 사정도 똑같은 경우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내 경우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에 대한 우여곡절이 깊은 삶이어서 스스로도 쉽게 그 연유를 찾지 못했기에 정신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깊은 곳을 여행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해녀들이 전복과 소라를 따듯이 무의식의 밑바닥 깊은 곳에 버려진 또는 숨겨진 펜과 노트를 찾아내면서 심층적인 소망을 알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좋은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운동이다. 책상 앞에 오랜 시간 앉아있으면서 허리에 무리를 느끼게 되었고 걷기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그때 만약 꿈을 꾸지 않았다면 지금도 아마 걷기 운동으로 만족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을 느끼고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그 시절, 꿈에 헬스장이 자주 보였다. 멋진 헬스 기구들이 번쩍이는 공간이 보이기도 했고, 그 안에서 내가, 또는 근육질의 멋진 남성이나 여성이 운동을 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나왔다. 그런 꿈을 꾸면서도 당장 헬스장에 갈 마음은 내지 못했다. 당시에 새로 시작한 일에 적응하느라 팀원들과 수시로 연락을 해야 했고, 잠시라도 연락이 안 되면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틈틈이 걷기로 만족하면서 운동에 대한 책을 읽는 것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때, 한근태 작가님의 책을 읽는데, '걷기는 운동이 아니다'라는 결정적인 문장을 만났고, '당장 일어나서 헬스장에 가라!'는 선동적인 문장을 보았다. 꿈의 비전과 현실에서의 노력이 만나서 불꽃을 일으키면서 헬스장에 등록했고, 지금 2년째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를 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다. 나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콘텐츠로 책을 낸다면 이 대목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의식적인 태도가 적절하게 균형 잡혀 있을 때, 꿈은 현실과 일치하여 나타난다.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이 균형 있게 일치를 이룰 때, 꿈에서의 내 모습도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루고자 하는 이상과 이룰 수 있는 힘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것이다. 구도의 춤꾼으로 알려진 홍신자 선생님의 책 제목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이와 결을 같이 하지 않을까 한다.

'꿈은 환상이며, 환상이 많은 사람은 괴롭다. 환상은 복잡한 현실을 잊게 하는 달콤함을 제공한다. 하지만 환상이 달콤할수록 삶은 점차 왜곡된다.'

이 책 11쪽에 실린 글이다.


칼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인간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꿈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잘 활용할 때, 선몽이 되어 운명을 개척하는데 유용한 나침반으로 사용할 수 있고, 꿈의 달콤함에 빠져있으면 현실과 더 멀어지는 악몽으로 변할 수도 있다. 무의식은 올바르게 의식화할 때 선몽이 되어 선한 힘을 발휘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느냐이다. 꿈을 활용한다는 것은 전체정신을 바라본다는 것, 결코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요행이나 횡재가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한걸음 한걸음의 노력일 뿐이다. 그 노력으로 도달하는 최고의 모습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이다.


홍신자는 자신의 마지막 스승 마하라쉬의 말을 들려주면서 '세상은 환영이며 따라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라'고 한다.

"너는 이제 떠나기 바란다. 거리의 춤추는 거지가 되든, 이름 없는 동네의 아낙이 되든, 무엇을 택해도 좋다. 너는 이미 삶은 환영일 뿐이라는 진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라. 가서, 갠지스 강가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든, 도시의 인기 높은 광대가 되든, 결국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네가 원하는 바를 따라가라. 아무 두려움을 가질 것 없다."

누 작가가 되어야 할 한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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