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일기 | 20240127
된장국을 끓이려고 우려낸 멸치 국물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글을 쓰기 위해 평소와 같이 드립 커피를 내렸고, 평소 같으면 커피 향으로 채워졌을 책상 주변의 냄새가 멸치 국물 냄새의 압도적인 점유로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얼굴 가까이에 커피잔을 가져오면 커피 향이 나지 않을까 하고 커피잔을 들어 코 가까이에 바짝 붙였다.
얼굴에 뜨거운 김이 올라와서 수증기가 맺히도록 큰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멸치 냄새의 방해로 이토록 적극적인 냄새 맡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커피 냄새가 나긴 하지만 예상 밖의 미약한 정도밖에 감지되지 않았다.
아침을 기분 좋게 깨워줬던 구수하고 고급진 커피 향도 아니다. 쓴 향이 올라왔다.
부드럽고 우아한 커피 향은 멸치 냄새에 밀려서 정체성을 잃었다.
향이 느껴지지 않는 커피는 맛도 더 쓰게 느껴졌다.
멸치 국물 냄새 하나만이 집안을 가득 채울 때 느껴졌던 푸근함과
커피 향이 내려앉은 책상 앞에 앉아서 새 페이지에 글을 써 내려갈 때의 안정감이
두 가지 강력한 냄새의 충돌로 어느 것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곤경에 처했다.
커피 향이 실종된 커피를 마시고 혀에 쓴 맛이 더 강하게 오래 남았다.
글을 쓰는 동안 멸치 냄새도 커피 향도 각자의 갈길로 떠나가고
멸치 냄새로 인해 실종된 커피 향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커피 향은 향수처럼 한순간 강력하게 후각에 작용해서 뇌에서 기분 좋은 물질이 나오게 한다.
매일 아침 루틴이 된 커피 향을 한순간 잃어버림으로써 역할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속을 편안하고 든든하게 채워주는 된장국 맛의 일등공신인 멸치 국물 냄새의 위력도 다시금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으로 세상에 나의 일부를 표현해 내고 자취를 남기고 있다.
나에게서 나온 글과 그림이 누군가의 시감각에 포착되어 어떠한 느낌을 주고 여운을 남길 것이다.
그건 냄새일까, 향기일까, 창문을 열고 환기시켜서 빠르게 날려버릴 무엇일까, 조금 더 오래 머무를 만한 무언가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