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물이라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
출처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오래전 어딘가에서 읽은 글이었고 그 글은 매우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 글을 이어서 써보았다.
같은 비라도 가문 논에 내리면 단비가 되고 모래 수렁에 내리면 늪이 된다.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누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을 물어보면 선택 장애가 오곤 했는데, 그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박을 제일 좋아한다고 발표용으로 선택해 놓기도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캐릭터와 필명 오렌은 오렌지를 상징한다. 사실 처음 이 이름을 사용할 때는 오렌지는 생각한 적도 없었고, old의 의미인 오랜이었다. 오랜공작실이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는데, 그때 사용한 오랜이라는 필명을 사람들이 오렌지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했고, 그 생각이 나에게 들어와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면 더 좋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했고, 추상적인 오랜 보다 형태와 색깔이 선명한 오렌지가 캐릭터 만드는데도 더 유용하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원래의 뜻이었던 오랜이 심층으로 사라지고 표층에는 오렌지가 드러나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소망과 세상의 요구가 만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소명이라고 했던가.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오렌지를 나에게 선물해 준 세상과 오래된 나의 기억들을 엮어서 새롭고 상큼한 무언가로 탄생시키고자 하는 창작자의 소명을 끌어안게 되었다.
예뻐서 좋은 딸기, 별이 들어있는 사과, 감, 원숭이와 같이 좋아하는 바나나,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는 루비 상자 석류, 채소인지 과일인지 헷갈리게 하지만 건강에 좋은 토마토, 창조주의 예술적 감각에 놀라게 되는 용과,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된 오렌지 만세!
수박, 딸기, 사과, 감, 바나나, 석류, 토마토, 용과, 오렌지... 천차만별로 형상화된 과일들은 진정 같은 물을 마셨던 걸까? 이들이 정말 씨앗이었고, 꽃이었던가? 어여쁜 색깔과 향기로 배를 불리고 기쁨을 주는 열매를 생각한다. 나의 씨앗을, 꽃을, 열매를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