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틱> 22화.
그럼 좋다. 도대체 자넨 누군가?
메피스토펠레스 :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오히려 늘 선을 창조하는 저 힘의 일부분입니다.
파우스트 :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메피스토펠레스 : 저는 언제나 부정하는 정신입니다!
또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겨나는 모든 것은 멸망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텐데.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니 파괴니 부르는 것,
간단히 말해 악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저의 본래의 성분입니다.
파우스트 : 자네는 자네가 일부분이라고 말하는데, 전체로서 내 앞에 서 있지 않느냐?
메피스토펠레스 : 저는 소박한 진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인간, 즉 어리석은 작은 세계는
보통 스스로를 하나의 전체로 여긴다면:
저는 처음엔 모든 것이었던 부분의 일부분.
빛을 낳은 어둠의 일부분입니다.
교만한 빛은 이제 어머니인 밤을 상대로
그녀의 옛 지위와 공간을 두고 다투고 있지만,
아무리 애써 본들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물체에 사로잡혀 달라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은 물체에서 흘러나와 물체를 아름답게 하지만
물체는 그것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오래지 않아
빛은 물체와 더불어 멸망할 것입니다.
파우스트 : 이제 자네의 귀중한 임무를 알겠네!
자네는 크게는 아무것도 파괴할 수 없으니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려는 것이로군.
메피스토펠레스 : 물론 그렇게 해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괴테, <파우스트> 제1부(1808년), 서재에서의 장면 중에서
한 해석의 시사
메피토스펠레스는 노발리스가 "밤"이라고 부르고 그것의 높은 근원성에 자신의 찬가를 바친 그 "어둠"의 사자로 자신을 이해한다. 여기서, 즉 괴테에게서 근원은 그로부터 모든 것이 출현하는 곳으로서보다는 본래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멸망하는, 근거로 가는") 곳으로서만 나타난다. 멸망이 출현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오히려 늘 선을 창조"한다고 말함으로써 인정한다. "물체", 즉 정신없이 자기 확신 속에 있는 미숙한 사태가 자신을 참다운 존재자로 이해하고 고정시키는 곳에서만 헤르메스적 원리는 해체적이고 파괴적으로, 즉 "약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나 "악"은 자기 자신에게 홀딱 빠져 있는 사태나 사람이 반사된, 거울에 비친 상일뿐이다. 내적으로 실패한 삶에게만 헤르메스적 원리는 악으로 나타난다. 성공하는 삶은 언제나 부정적이다. 이는 그것이 사물들을 승인할 때도 그렇다. 달리 말해 : 부정에는 실패가 뒤따르고, 긍정에는 성공이 뒤따른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헤르메스적 원리의 (어쩌면 문학이 아는 가장 거대한 ) 기념비적 작품이다.
파우스트는 오랫동안 학문이라는 낮과 빛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인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정신 원리가 상실되면 정신의 생명력도 상실된다. 올바름(정향성)이 인식의 최고 원리가 아니다. 올바름만이 주어진다면 앎은 고루함으로 전도되고, 명료함은 집요함으로, 해명은 고착화로 전도된다. 단순한 인식의 원리로부터는 이러한 돌변이 이해될 수 없다. 아니 인지될 수조차 없다. 헤르메틱의 경계를 넘어서야만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고, 제 학문의 모든 수확과 더불어 주어지는 엄청난 상실을 파악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헤르메스적 원리를 망각할 수는 있었지만 상실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식 세계의 얕음이 극복할 수 없는 권태의 형태로 현존한다. 저 유명한 독백에서 그는 많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것은 발현하지 않았다는 근본진리를 표명한다: "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쓸데없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했건만..." 거기에 그는 이제 서 있다.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엾은 바보에 불과한 그가.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헤르메스적 세계에서 근본적인 갱신을 경험하기 위하여, 지하로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즉 세례를 받기로 결정한다. <파우스트> 1부와 2부는 헤르메스적 원리에 의한, 한 아폴론적 인간의 근본을 뒤흔드는 세례이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자발적으로 다른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필요한 변모들에 능통한 숙련된 안내자, 즉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서야 도달한다. 메피스토, 헤르메스가 아폴론적 세계의 빛 안에서 나타나는 한, 헤르메스의 그림이다. 달리 말해, 헤르메스는 아폴론적 관점 내에서는 단지 일종의 악마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메피스토는 불의 정신, 비상의 정신이고 세계 사이의 존재이며, 주술사요 마법사다. 근본적으로는 수호신이고, 실제로는 창조적 원리이다.
창조적인 것은 헤르메스적인 것의 일면이다. 헤르메스의 세계로 깊이 잠수하는 자만이 설명할 수 없는 참신함을 가지고 아폴론적 세계로 되돌아올 수 있다. 창조적 인간인 파우스트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는 되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기 위하여 유혹자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왜냐하면 그러한 길의 발견만이 그의 세계에 (창조적인 인간이 현실적인 것의 본질로 알며 필요로 하는) 도출할 수 없는 참신함과 순수함과 독창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메피스토가 악마란 말인가? 악은 창조적 과정이 전도되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히는 곳에서 생긴다. 헤르메스적 원리가 선사해준 설명할 수 없는 능력, 특별한 업적이 자기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사태의 진리에 어긋난다. 이러한 어긋남이 근원적 어긋남, 즉 신들이 당연히 처벌하는 "악"이다.
악은 창조적인 것의 이면이다. 악은 다시 말해 자신이 의거하고 있는 현실적인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구부려진 창조적인 행위이다. 그리하여 "홀레"는 "지옥"이 되고, 헤르메스는 메피스토가 되며, 신적인 정신은 악마가 된다. 이는 더 이상 현저하고 심할 수 없는, 하지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급변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러한 급변으로부터, 그리고 이러한 오류의 인식으로부터 자신을 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실 한가운데서 현실의 돌파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것은 굉장한 사건, 불안을 야기하는 사건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헤르메스가 은폐성의 신이며, 이런 신으로서 스스로 은폐되어 있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힘은 앞으로도 인간에게 박탈되어 있을 것이며, 인간에게는 무수한 혼동과 오해 속에서 현실의 힘을 뒤쫓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 그리고 그 주위에는 비옥한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
이 연재 브런치북 <헤르메틱>은 헤르메틱에 대한 필사로 이어가면서 헤르메틱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꾼 수많은 꿈들 중 유일하게 보인 신의 이름이다.
오랫동안 헤르메스라는 키워드로 찾아 헤매면서 헤르메틱이라는 정신적 지향, 작가적 고향에 도달했다.
헤르메틱은 어둠 속에서의 비상이다. 헤르메스적 근본 경험은 붕괴와 근원적 도약, 발견, 건너감이다.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내고, 끝까지 살아남으며, 스스로 힘을 갖는 존재 방식이다.
헤르메틱에 대해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H. 롬바흐의 저서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의 내용을 필사. 요약하는 것으로 '존재의 헤르메틱', '예술 작품의 헤르메틱'에 대해 소개하고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이 정리본이 차후에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든 그 뼈대가 될 것이다.
♡♥ 처음으로 싸인을 해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