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좋아하는 것 02

2. 검은콩

by Defie

"손등에 점이 생겼네..." 남편이 아이의 손등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엄마 따라 같은 자리에 점이 생긴건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답하는데, "그때 링겔자국인가보다" 라고 남편이 말해준다.

아... 그때 였지..? 작년 겨울쯤이었나,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응급실에 갔던 적이 있었다.


기기운이 있어 어린이집에 못 보내고, 프리랜서인 남편이 아이를 돌봐주던 평일의 어느 날-

저녁식사준비를 하던 남편이 싱크대옆에서 '놀아주세요'라는 눈빛을 보내는 아이에게 여느때와 같이 '놀이용으로' 검은콩 몇 개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소꿉놀이용 주황색 플라스틱 병 속에 검은콩들을 하나씩 담았다가 바닥에 늘어놓고, 다시 담는 놀이를 참 좋아했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저녁시간이 흘러가나 했으나 아이는 아빠의 눈을 피해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손 안에 쥔 검은콩을 플라스틱 병이 아닌 콧구멍에 집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밥상을 함께 차리던 중 남편은 "아이 오른쪽 콧구멍속에서 검은콩을 하나 빼냈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속으로는 엄청 놀랐지만 하루종일 아이를 돌보던 남편에게 뭐라할 수 없어 짐짓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면서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는 먼저 저녁식사를 마친채로, 엄마 아빠가 한 자리에 모인게 마냥 신나서 놀고 있었다. 아이 아빠가 직접 콩을 빼냈고 확인까지 했을테니 작은 콧구멍속에는 검은 콩이 더이상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을것이다... 라는 생각에 그대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몇번의 숟가락질이 오간 후,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아 쳐다본 아이의 얼굴, 콩 하나가 나왔던 아이의 콧구멍에서 검은 콧물이 흐르고 있었다. 식사 중지, 불편한 자세가 싫어 몸부림치는 아이를 뒤집어 눕히고 플래시를 켜서 아이 콧구멍 속을 확인했다. 무언가 검은것이 더 있었다.

...


밤 9시, 그 길로 한걸음에 달려간 '야간진료를 하는' 이비인후과에서 울며불며 몸부림치는 아이를 잡고 콩 하나를 더 빼냈다.


'휴....'

안도의 숨도 잠시, 확인차 살펴본 아이의 콧구멍 속에 콩이 하나 더 있단다...

남편과 , 나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폐로 넘어가면 폐렴을 유발할수도 있다고 하니 얼른 빼내야 하는데, 아이가 너무 몸부림을 쳐서 빼는 것이 어려웠다. 억지로 빼려고 하다가 콧속을 다칠우려가 있어, 아이가 움직이지 않게 마취를 하고 진행해야 한단다.

이 곳에서 더이상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

2살밖에 안된 아이에게 마취라니...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한 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즉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밤 10시, 처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 대학병원 응급실. 사방에는 아프고 긴박한 손길을 기다리는 어른들이 가득했다. 아이는 낯선 곳에서 연신 엄마를 찾았고 이 곳이 익숙하지 않은 초보엄마인 나에게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여기에 수면마취를 진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부작용과 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진행하겠다'는 내용의 마취동의서를 읽을 때 그 불안은 최고조에 달했다. 부모의 불안을 알아챈 간호사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병원이니까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 괜찮다'면서 조금 마음을 다독거려주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으니까, 울며겨자먹기로 사인 완료.


그로부터 20여분이 지났을까?

수면마취를 위해 우선 링겔 주사바늘이 손등에 박혔다. 아이는 주사바늘이 무섭고, 또한 불편해서 손에서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울어댔다. 5분간의 마취, 스르르 잠든 아이의 콧구멍 속으로 다시 한번 은색 무언가가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색 껍질이 팅팅 불어서 초록 속살을 드러낸 콩 하나가 무사히 아이의 코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Mission Clear

아이는 조금 기운이 빠진채로 남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혹 수면마취의 부작용으로 아침에 깨지 못할까 싶어, 부모의 불면은 아침까지 이어졌었다.


아이의 손에 생긴 작은 점은 바로 그날 맞았던 링겔자국의 흔적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검은콩 때문에 혼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콩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고 콩밥과 콩자반을 맛나게 먹는다. 반면 원래부터 콩을 좋아하지 않았던 남편은 검은콩에 노이로제가 걸린 듯 콩밥안의 콩을 대놓고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족 건강에는 쌀밥보다는 콩밥이 좋으니까, 여전히 우리집 밥상에는 콩 밥이 올라오지만,

그 날 이후로 아이는 더이상 콩을 가지고 놀 수 없게 되었고, 그와 함께 아이의 콧속에 들어갈만한 사이즈의 모든 것들이 아이의 시야, 손이 닿는 곳에서 전부 사라졌다.


오늘도 여전히, 숟가락을 들기 전에 밥 안의 콩부터 하나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아이의 '검은콩 사랑'

'콧구멍 속에 콩을 넣다'니- 개그프로에나 봄직한 어이없고 웃긴 일이지만, 무심코 했던 아이의 장난에 아이의 안전과 건강이 오가는 터라그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잘 지나갔어서 이제 가족의 '에피소드'로 기억되는 것이겠지- 그 작은 오른쪽 콧구멍 속에 3개나 들어있었던 콩을 하나라도 놓쳤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어진다.


그래도 콩을 가리는 일없이 잘 먹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좋아하는 검은콩 먹으면서 쑥쑥 잘 크자, 따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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