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바라나시를 떠나다
▲ 소망 새벽의 갠지스강이다. 조그마한 디아가 떠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빌었을까? 참고로 얘기하자면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밤에 마신 레몬짜이도 다 토했어요. 먹은 것이 없어서 나올 것도 없는데. 밤새 기어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데 엄마는 주무시고, 그렇다고 섭섭하다는건 아녜요."
"그 정도로 심한 거야? 어떡하니?"
밤새 핫팩을 가지고 몸을 따뜻하게 했는데도 나아질 기미는 없고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낭패였다.
"엄마 나 말라리아인 거 아냐?"
"얘는 무슨 소릴?"
딸을 안심시켰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출국하기 전에 예방주사 맞으라고 했는데 12월에 복잡하고 분주해서 시기를 놓쳤고 여행자보험도 안 든 상태로 무모하게 떠난 여행이었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근거없는 자만감으로 떠난 여행이다. 설마가 내게 해당되다니. 갑자기 온갖 종류의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 비상 갈매기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다. 딸 너의 삶도 빛나는 비상이 되겠지?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아침 6시가 되어간다. 어제 저녁 K가 보트 한번 더 탈려면 6시까지 철수네 보트 앞으로 오라고 했었다. Y는 좀 상태가 나아져서 배는 안 타고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며 옷을 두텁게 입고 가트까지만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딸은 그냥 누워 있었다. 딸의 얼굴은 누렇고, 먹는 걸 사랑하던 딸의 배는 푹 꺼져 있었다. 만 이틀을 못 먹고 위로 아래로 배설만 했으니까. K를 만나서 의논도 해볼겸 갔다 오겠노라고 숙소를 나섰다.
▲ 철수씨 배에서 내리는데 물에 빠질까봐 무섭다고 했더니 배를 가까이 대주었다. 닻이 박혀서 빼내느라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해맑은 철수씨 따라가서 영혼을 꺠우는 버터빵과 짜이를 먹었다.
Y는 가트에 앉아 있다가 힘들면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침일찍 일출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일출은 예뻤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3주 계획으로 떠난 여행인데 일주일 만에 접고 돌아가야 하나? 50대 아줌마가 딸하고 항공권만 들고 예약도 없이 배낭여행간다는 말을 듣고 주변에서 걱정해주던 사람들에게 한 마디 쿨하게 해주고 떠나왔는데.
"저 젊어요. 30대?"
사람들은 웃었다. 비웃음일 수도 있지만 애정어린 걱정이었으리라. 병원에 가면 괜찮아질까? 아님 공항에 가서 딸만 비행기 태워 보낼까?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병원비는? 여행자보험도 안 들었는데…. 어쨌든 K에게 물었다.
"가이드북에 적힌 큰 병원 가면 온갖 검사 다하고 돈이 장난 아니니까 이따가 제가 알려드릴게요. 아침 식사하고 가보세요. 가서 링거 맞고 그러면 괜찮아질 거예요."
▲ 수행 갠지스강 모래밭에서 수행하는 사람. 사진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no problem 이란다.
K도 한국으로 오늘 떠난다며 철수씨한테 보트투어를 길게 부탁한다. 강 건너편에 가서 떠오르는 해도 보고 모래밭에서 요가하는 분을 만나 사진도 찍었다. 메인가트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멀리 있는 다리까지 가자고 주문을 한다. 어부들이 있었다. 잡은 고기를 어디에다 파는 것일까? 먹을 수는 있는 것일까? 너무 많이 생각하면 복잡하니까 접었다.
아침강의 고기잡이배들은 여행객들에겐 낭만적이었다. 그들은 삶이겠지만 그들의 삶도 마음은 넉넉하니까. 늘 "no problem"이니까! '딸도 Y도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보트투어를 2시간 정도 하고 K는 고돌리아로 철수씨와 같이 갔다.
▲ 성스러움 아침의 갠지스강은 더 교요하고 평화로와 보인다. 삶과 죽음이 닿아 있는 갠지스강에서 그들은 삶을 지탱해줄 고기를 낚아올린다.
영혼을 깨우는 버터빵집으올 가잔다. 따라갔다. 버터빵에 뜨거운 짜이 한잔. 정말 맛있다. 영혼을 깨운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 정말 맛있게 먹었다. K의 말에 의하면 새벽에 나와서 손님들 보트투어를 끝내고 여기와서 버터빵과 짜이를 먹고 신문을 보는 게 철수씨의 유일한 호사라고 했다. 철수씨는 참 성실하고 단아해보인다. 오늘 빵은 철수씨가 샀다. 오늘 보트투어는 돈도 내지 말래서 안 냈는데. 처음 인도 들어왔을 때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예비사기꾼 쯤으로 생각했는데 미안해졌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 철교 메인가트에서는 보이지동 않는 멀리 떨어진 철교 이 근처에서 고기잡이배를 보았다.
하나를 더 포장해달라고 했다. 혹시라도 아픈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신문지에 빵을 싸준다. 어제 들렀던 파시미나집에 가서 P가 샀던 핑크색 숄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없단다. '이건 사지 말라는 신의 계시야'라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힌디 병원을 가르쳐 준다. 병원비도 비싸지 않고 잘 본다며.
K에게 자문을 구했다. 철수씨한테 미안해서 성의를 표하고 싶은데 뭐가 좋겠냐고. 파파야를 사자고 한다. 싱싱한 것으로 2개를 골라서 100루피 주고 사고(한국에선 비싸서 못 사먹는 파파야 2개를 한화 2000원에) 아픈 사람한테 줄 바나나도 한 송이 샀다. KG단위로 파는데 바나나 1KG에 20루피(한화 약 400원이다). 숙소로 가다가 골목에 도사 맛있게 하는 곳 있다며 가잔다. 집(숙소)에서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미안하댔더니 포장해도 된단다.
가게가 아니고 골목에서 좌판처럼 펴놓고 프라이팬 하나로 장사하는데 부부인 듯했다. 42루피에 3개를 시켰다. 양파와 칠리를 다져넣은 반죽을 얇게 펴 익힌 다음 접어서 머스타드 소스같은 것을 바나나잎 접시에 담아서 함께 준다. 14루피(한화 280원 정도)밖에 안 하니까 교복입은 학생들도 사간다. 아침인지 도시락인지. 인도는 우리처럼 똑같은 시각에 등교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아침 일찍 가는 학생도 있고 아침 늦은 시각에 가는 학생도 있다. 나와 P는 반씩만 먹고 남겨서 가지고 갔다.
▲ 소원 강가에서 몸을 씻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라나시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바라나시에 있는 우린 현대가 아닌 중세의 어디쯤에 있는 것같다. 거의 모든 사람이 종교에 심취해있고 고대신앙처럼 많은 신을 모시는 인도인들을 짧은 여행으로 이해하기는 참 난해한 것 같다
딸 병원진료때문에 11시에 로빈가게에서 K와 만나기로 했다. 숙소에 와서 딸을 일으켜 로빈네 가게로 갔다. K는 철수씨의 조카(철수씨 형의 아들) 똘똘이(원 이름은 비벡인데 K가 붙여준 이름)에게 데려다 주라고 부탁을 한다. 의사한테 얘기해주라며 똘똘이에게 딸의 증상을 설명해주고 나보고는 안 가도 된다고 했다. 딸에게 돈과 여권을 들려서 똘똘이에게 잘 부탁을 하고 같이 보내는데 걱정이 되었다.
인도 유심 얘기를 했더니 K는 세창이(철수씨의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구해오라고 한다. Y도 부탁을 해서 2개를 구해 오기로 했다. K는 구해온 유심으로 내 폰에 넣어 세팅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딸때문에 오늘 바라나시를 떠나긴 어렵다고 생각하고 기차표를 취소하려 했더니 수수료 좀 주고 로빈에게 맡기란다. 기차표 취소하고 새로 구매하려면 여권 사본이 있어야 하는데 복사할 곳이 마땅찮아서 여권을 통째로 보냈다.
Y와 P도 떠난다 하고 K도 오늘 한국으로 돌아간다 하고 우리만 남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서운했다. 겨우 3일 친했는데, 참 묘하다. 어쨌든 3가지를 진행시켜 놓고 마음은 심란하다.
K는 내 폰에 유심을 세팅하고는 충전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1G만 충전하면 웬만큼 쓸 수 있다며 세창씨를 부른다. K는 귀국할 짐 챙겨 나온다고 들어갔고, 병원간 딸이나 기차표 취소하러간 사람이 안 온다. 여권 생각에 불안하고, 딸에게도 혹시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좌불안석이었다. 떠난 지 1시간이 넘어 2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Y와 P는 짐챙기러 숙소로 가고.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이야….
한참만에 기차표 취소하러 간 친구가 왔다. TTAKALL은 취소가 불가능하다며 표를 그냥 돌려준다. 3일 후인 19일 표만 있다고 한다. 처음엔 수수료 150루피를 얘기했는데 미안한 지 그냥 수고비 100루피만 달래서 주었다. 기운은 빠졌지만 더 중요한 건 딸의 건강이다. 그까짓 돈쯤이야. 오히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K에게 말해서 딸이 안 오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더니 똘똘이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본다. 환자가 많아서 기다렸다가 초음파 검사를 했고, 지금 보내니까 물 2리터 다 마시고 1시간 후에 와서 한가지 검사를 더해야 한다고 했다.
▲ 고돌리아 풍경 나이는 열 서너살 쯤? 한국으로 보면 중학생쯤 되었을 법 한데 자전거를 개조한 수레에 짐을 잔뜩 실어 운반하는 듯하다. 인도에서는 학교에 못다니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은듯하다.
K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여러가지로 고마워 한국 가면 근사하게 밥 사겠다며 연락달라고 내 명함을 건넸다. K도 떠나고 Y와 P도 떠난다고 체크아웃하러 간다. 딸이 돌아왔다. 물을 2리터나 마시고 1시간 후에 다시 가서 검사해야 되는데 물이 안 먹혀 먹을 수가 없단다. 물은 안 마시고 병원에 다시 갔다왔다. 주사도 안 맞고 그냥 검사만 했다며 약만 받아가지고 왔다. 내일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딸에게 기차표는 취소가 안 되었고 사흘 후 19일 것만 있다고 했더니 그냥 떠나잔다.
"딸 배낭 맬 수 있어?"
"네."
"무거운데, 10kg쯤 될텐데."
"내장기관이 약한 거지, 힘은 있어요."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이다. 체크아웃을 하라고 딸을 먼저 숙소로 보냈다. 난 충전해 올 유심칩을 기다리다가 짐부터 꾸려야 되겠단 생각에 로빈한테 부탁을 했다.
"세창씨 충전해오면 여기서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딸은 몸 상태가 안 좋은 멘붕상태에서 체크아웃시간이 12시인데 4시간쯤 지났다고 하루치 500루피를 다 받았다는 걸 안 나중에야 팔팔 뛰었다. 딸이 아프다고 물 1병만 끓여 달라고 했었는데 그 값도 받았다.
▲ 평온 보트에서 바라본 가트이다. 저녁의 성스럽고 번다함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경건해 보인다.
빛의 속도로 짐을 꾸렸다. 웬만한 것들은 최대한 내 메인배낭에 넣고 작은 가방들도 다 내가 들고 메인배낭만 딸에게 맡겼다. 골목은 어찌나 복잡한지, 배낭과 카메라 가방 등 내 어깨에 줄줄이 가방들을 메고 나오는데 사람들에게 치인다. 다행히 딸은 큰 배낭을 메고도 잘 걸어온다. 위기에 닥치면 잠재적인 힘이 생기는 모양이다.
바라나시정션역에는 우리 말고도 카주라호로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좀 안심이 되었다. 불안한 마음에 한국인들에게도 외국인에게도 기차출발시각과 기차번호가 맞냐고 확인 확인 또 확인을 했다. 출발 40여분 전인데도 열차번호가 안 뜬다. 델리의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설마 또 연착? 다행히 열차는 제 시간에 왔고 무사히 탔다. 정말 힘들었던 바라나시를 뜨는구나. 바라나시여 안녕! 인도를 다시 온대도 바라나시는 안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까지 12시간을 가야 하는데 괜찮겠지. 더 아픈 건 아니겠지.'
" 딸 정말 고마워! 자리털고 일어나줘서."
'지금껏 딸에게 이렇게 큰 고마움을 느낀 적이 있었나?' 가슴이 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