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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Feb 26. 2023

한고비 뛰어넘기

from 서울. 생일

 한고비 넘고 나면 잠깐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집니다. 절정의 어려움을 넘겼으니 한동안은 그만한 고난은 면할 수 있는 거죠. 매일 하던 운동이라도 문밖을 나서기까지가 가장 큰 고비잖아요. 일단 거기까지 해낸다면 다음은 어떻게든 하게 되더라고요.   


  

 ‘백일의 기적’. 아기가 백일이 넘으면 어느 정도 생활양식이 잡혀 잠자는 시간이나 밥 먹는 때가 어렵게나마 예측이 가능해진다는 말이에요. 이전처럼 급작스레 들리는 울음소리에 황급히 달려가 아기를 어르고 달래던 날이 지나고, 이쯤 되면 잠들겠구나, 곧 일어나겠구나, 배고파 울겠구나 어렴풋이 감이 오는 시기가 다가오는 거죠. 백일 전까진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얕은 잠에서 대중없이 깨어야 했다면 그 후엔 어림짐작한 시간에 서너 번 일어나 아이를 보살피면 될 듯합니다. 서너 달 사이 보이는 이 급격한 변화에 ‘백일 되면 사람 된다.’, ‘백일까지만 버텨봐라.’ 사람들은 말하곤 하나 봐요. 정말일까, 의심 반 기대 반으로 탄생 백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무 자르듯 어제 99일과 오늘 100일이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확실히 이전보단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우는 예상하기 힘들 때 자주 깨고 크게 웁니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은 아니구나 싶었어요. 저에게 백일은 절대 숨 돌린 구간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백일 자란 아이에게서 벌써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요.      


 작은 아이를 눈앞에 두고 마음을 편히 가지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모든 양육자가 그렇듯 하나 놓칠세라 유심히 아이를 살폈고, 지나치게 긴장했고, 힘을 다해 안아줬습니다. 잠이 부족한지도, 몸이 상하는지도 나날이 커지는 걱정 덩이에 눌려 제대로 느끼지 못했죠. 언제가 되어야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길까, 아이가 사용한 모든 물건을 소독하고 매끼 손수 만든 이유식을 불 앞에서 저어대며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여태 꽉 조여왔던 몸과 마음이 점점 피로해짐을 느끼고 있었어요. 누군가 정확한 순간을 기점으로, 이젠 좀 느긋해져도 된다 말해줬으면 싶더라고요.     


 줄어들 줄 모르는 걱정 보따리를 인 채 답답해하던 가슴이 한풀 차분해진 건, 의외로 지우의 첫 생일, 돌을 준비하면 서였어요. 아이가 태어나 사계절을 보내고 치르게 되는 돌은 양육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행사이기도 합니다. 뭐든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 앞서니까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아이를 돌보느라 꽉 찬 일과를 다시 쪼개 틈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시작 전부터 덜컥 겁이 납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고 어느 날보다 특별한 하루를 맞을 그때를 위해, 결정해야 할 것도 서둘러야 할 일도 참으로 많습니다. 잘 치르고 싶은 중압감에 미뤄두기만 하던 지우의 첫 생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코로나로 직계 가족들만 모이기로 했지만, 행사 규모만 작아졌다 뿐이지 과정은 제자리라 챙겨야 할 것이 많습니다. 생일을 치를 장소, 돌복, 돌상, 돌잡이. 하나씩 차근히 배워가며 손수 준비하다, 생일 맞은 아이를 살피는 따뜻한 마음을 차례로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아이를 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결 가슴속이 가벼워지며, 한숨 크게 내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난지 열두 달, 곧 지우의 첫 생일입니다. 난생처음 맞는 소중한 날을 아이와 어떻게 보낼까 꽤 고민했어요. ‘처음’이 주는 설렘도 있지만, ‘처음’이라 가지게 되는 부담감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후회 없이, 어린 탓에 사진으로만 기억되겠지만 훗날, 앨범으로 추억해 보더라도 정말 기쁜 날이었구나 짐작할 수 있는 값진 날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어째, 생일을 맞은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양육자는 바빠집니다. 꼬박 일 년을 돌아온 아이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그간 한 생명을 무탈하게 키워낸 양육자의 노고를 인정받는 자리기도 하니, 가슴 벅참도 더해지네요. 낳고 키워낸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돌을 성에 차게 보내기 위해 자연히 애를 쓰게 됩니다. 어쩌면 아이는 기억도 못 할 가장 성대한 생일이라 순 양육자 욕심인가 싶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본디 무사히 자라 준 아이를 축복한다는 의미를 꾹꾹 눌러 담아 차분히 준비하기로 합니다.      

 지우의 첫 돌은 가능한 전통을 따르기로 했어요. 돌에만 할 수 있는 고유 풍습들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마침, 인근에 고택이 있어 고민 없이 장소를 결정합니다. 500년이 넘은 한옥 느낌이 좋았어요. 집은 사람이 살아야 생명을 가지잖아요. 오랜 옛날에도 사람이 살았고, 그런 곳에서 몇백 년 뒤 돌쟁이가 생일을 보낸다는 게 의미 있을 거라 판단이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삶을 담아낸 생명력 가득한 공간에 우리의 하루를 보탠다는 사실이 얼마나 뜻깊은지 생각해 봤어요. 곳곳마다 시간의 손길이 묻어 처음 와보는 공간답지 않게 아늑하니 참 편안하다 느끼기도 했고요.    


 

 돌복은 한복입니다. 살아가며 한복을 입을 날이 몇 번 되질 않잖아요. 자연히 생애 첫 한복을 고르는데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됐어요. 생일 준비는 생각보다 흥이 나네요. 돌날 쓰이는 모든 사물에 의미가 담겨 하나하나 알아보는 과정이 재미있더라고요. 게다가 모두 아기의 안녕과 미래를 축복하고 있으니 양육자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죠. 제대로 갖추면 갖출수록 막강한 힘을 두른 듯 안심이 됩니다. 지우의 돌복은 푸른빛을 띤 한복으로 정했어요. 돌이라고 해도 통상 입는 한복이겠거니 여겼는데 돌에는 아기에게 복건을 씌우고, 돌 띠를 매 줘야 한답니다. 복건이야 몇 번 본 적 있지만, 돌 띠는 정말 생소했어요. 고른 지우의 돌 띠는 동그란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형태였는데, 돌 띠에 새긴 자수는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뜻하는 동식물들이라고 하네요. 주머니엔 곡식이 들어있어 평생 먹을 걱정 없이 다복하다는 의미도 있다 합니다. 겨우 한 해를 산 아이가 입을 옷과 장식들이라 보기만 해도 깜찍한데, 고 아기자기한 것들에 반가운 의미들이 담겨 있으니 감사함까지 더해집니다.      


 예전에는 돌상을 네모진 것 대신 둥근 걸 사용해 아직 걸음이 서툰 아이들이 부딪히지 않도록 했다고 해요. 전통 풍습에는 세세하고 따뜻한 배려가 묻어있어 속 깊음에 매번 탄복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 모든 의미가 우리 아이를 보살피고 있으니 든든하기도 하고요. 상에 올라가는 음식에도 저마다 뜻이 있어요. 무병장수, 소원성취, 액운방지 등 모든 양육자가 아이에게 바라는 소망들이 담뿍 담겨 있죠. 막연히 아이가 잘 자라길 바라는 게 아니라 상징적인 사물을 상에 올리며 빌게 되니 왠지 더 미더워집니다. 평소 믿음보단 의심이 많은 양육자지만, 이날만큼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굳게 믿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돌상 어느 것 하나 돌쟁이를 위하지 않는 게 없어요. 의미를 알게 되니 더욱 정성 들여, 조심스레 흠 없이 모양 반듯한 것들을 골라 아이의 앞날이 탄탄하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지우는 책가도가 그려진 병풍을 두르기로 했어요. 생일 차림이 복잡할 것 같지만, 오히려 정해진 구색이 있어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덜해요. 알면 알수록 첫 생일은 가벼이 여길 날이 아님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돌에 빠질 수 없는 게 돌잡이 아닐까요. 기억은 없겠지만 돌쟁이 때 대부분 돌잡이를 해 보셨을 거예요. 저도 실을 잡았었대요. 장수한다는 의미죠. 예전에는 학문이나 무예를 상징하는 물건들을 남아에게, 바늘, 옷감 등을 여아에게 올려, 남아와 여아 돌잡이 상에 차별을 두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남녀 구분보다 양육자가 바라는 상징적인 물건들을 취향껏 올리기도 한다네요. 지우의 돌잡이 상은 기본에 충실해, 공책, 붓, 벼루, 먹, 자, 마패, 엽전, 피리, 도자기, 거울, 실패, 활과 화살, 쌀, 약탕기, 명주실을 올리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가지 수가 많죠? 하나 빠뜨릴 수 없던 이유는, 넘치는 궁금증 때문입니다. 처음 아이가 무엇을 집는지에 따라 장래를 짐작해 본다고 하는데, 지우가 무얼 잡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네요. 어떤 경우엔 양육자가 바라는 걸 잡을 때까지 계속 돌잡이를 하거나, 억지로 손에 쥐여주기도 한다던데, 혹시 저도 그러고 있진 않을까요?    

  

 돌이 끝나면 상차림에 올라있던 떡과 과일을 나눠 먹고, 돌을 축하하러 오신 분들은 미래를 축복하며 아이에게 선물을 전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친인척분들에게 답례 선물도 준비하죠. 지우 생일의 답례는 광목을 보자기 삼아 아기 이름이 새겨진 면 수건을 마련했어요. 축하해 주신 모든 분 손에 들릴 생일 답례품도 한옥과 어울리게 준비하고 싶었거든요.     



 고작 일주일을 앞둔 지금, 바쁜 준비와 수많은 결정들을 마무리하고 나니 새삼 처음 생일을 맞는 녀석이 장하다 생각이 들어요. 겨우 몇 달 되지도 않던 신생아 시절은 어째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여태껏 무탈하게 자라준 지우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불안함에 홀로 바라고 빌었던 지우의 건강과 앞으로의 날들을 좋은 의미만 골라 담은 생일상과 자리해 주실 많은 분과 함께 빌게 되니 한결 마음이 놓이기도 해요. 돌에 사용된 모든 사물은 아이를 축복한다지만 어쩌면 양육자를 안도하게 하는 의미가 더 클지도 모르겠어요.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까지 살펴 좋은 날을 빌어주니 그간 쌓인 마음의 짐은 덜어지고, 진정으로 그리될 것만 같아 한정 없이 기쁘기만 합니다. 강력한 힘을 받게 되네요. 돌은 아기를 만난 뒤 한숨 돌릴 적당한 때가 아닐까 싶어요. 그간 수고를 알아주고, 아기는 전보다 단단해졌으니 잠시 여유를 가져도 된다 격려해 줍니다. 고마운 의미가 가득한 첫 생일 덕에 한고비 잘 넘기고, 이전보다 즐기는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곧 맞이할 지우의 첫 생일, 무사히 잘 치르고 오겠습니다. 아가의 건강을 빌어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을게요!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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